15C 발레가 시작된 이후 서서히 턴아웃이라는 개념이 발달해 왔고, 17C 무대의 도입 후 더욱 본격적으로 체계화되었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180도의 완벽한 턴아웃에 대한 통일된 규칙이 없었고, 턴아웃에 대해 첨예하고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무용 교사 Fabritio Caroso는 그의 저서 Nobiltà di Dame(1600)에서 턴아웃에 대해 비판하며, 양 발은 반드시 똑바로 앞을 향해 평행하게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무용 교사 Sol.C. 는 그의 저서 Méthode très facile et fort nécessaire, pour montrer à la jeunesse de l’un & l’autre sexe la manière de bien dancer(1725, 번역하면 '남녀 청소년에게 아주 쉽고 필요한 춤 교본'이라는 뜻이다)에서 1번 포지션에서는 완벽한 180도 턴아웃을 해야 하지만, 4번이나 5번 포지션에서는 "잘(well)" 되는 데까지 하면 된다고 설명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무용 교사들은 각각 "90도 정도만 턴아웃을 해도 된다, 동작에 따라 어떤 때는 180도 턴아웃을 해야 하고 어떤 때는 90도만 해도 된다, 무리해서 과도하게 턴아웃하는 것은 허례허식과도 같다, 완벽한 180도 턴아웃을 구사해야만 깔끔하게 동작을 할 수 있다"와 같이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다.
위와 같이 턴아웃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이 난무하는 가운데 무용수들 사이에서는 점점 더 턴아웃을 더 완벽하게 구사하고 싶은 열망이 생겨났다. 그 결과, 1700년대 중반에는 해부학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턴아웃을 위해 고안된 운동기구가 나오기도 했다. tourne-hanche(hip-turner), boite(box)라고 불리는 장치로 발만 일자로 고정시켜서 턴아웃을 하도록 강제하는 기구였다.
좌: 18C tourne-hanche, 우: 19C tourne-hanche. 몸의 바른 정렬을 해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기구는 꽤 오랫동안 널리 사용되었다.
하지만 180도 턴아웃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무용수들은 지금과 같이 완벽한 턴아웃을 구사하지는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용수들의 신체능력이 계속해서 발달하게 되면서 지금과 같은 완벽한 턴아웃을 하게 된 것이다.
약 15년 전, 내가 전공할 때만 해도 트리플 턴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트리플 턴을 깔끔하게 도는 것은 매우 어렵고 훌륭한 일이지만, 이전에 비해서는 확실히 클래스에서나 무대에서 트리플 턴을 도는 모습을 훨씬 자주 볼 수 있다. 이전에는 무대에서 트리플 턴을 도는 사람이 드물기도 했고, 트리플 턴을 성공하면 턴에 특화된 인재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워낙 트리플 턴을 도는 사람이 많아서 그만큼의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이제는 4-5바퀴는 돌아야 턴에 특화된 인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실제로 발레뿐 아니라 다른 스포츠 분야도 세계 신기록은 점점 더 좋아지고 다양한 기술이 개발되는 걸 보면 참 인간의 신체 능력이 계속 발전하는구나 싶다. 이와 마찬가지로 완벽한 180도의 턴아웃 역시 신체능력이 발달하면서 얻게 된 결과이다.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발레리나의 이미지-"180도의 완벽한 턴아웃, 발등과 발목 라인이 완벽히 살아 있으면서 풀업 된 포인트, 깡말랐지만 잔근육이 갈라지는 멋진 몸"-는 생각보다 최근에 완성된 것이다. 실제로 이전 발레리나들의 사진을 찾아보면, 1980년대가 되어서야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발레리나 느낌이 나기 시작한다. 특히 1950년 이전의 발레리나들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발레리나의 모습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테크닉적인 면에서만 보면 어딘가 어설퍼 보이기도 하고, 턴아웃도 완벽하지 않으며, 잔근육이 갈라지기보다는 통통한 체형을 보여준다. 토슈즈의 포인업도 지금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지금의 발레리나와 같이 완벽한 발등 라인과 풀업을 보여주기보다는 토박스 위에 올라선 것에 의의를 두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1900-1950년대에 Paris opera ballet academy, Royal ballet academy, Vaganova ballet academy를 졸업한 대표적인 무용수들은 아래와 같다. (구글링 해보면 다양한 사진을 볼 수 있다.) -Paris opera ballet: Yvette Chauviré, Irina Baronova, Zizi Jeanmaire, Ludmila Tchérina, -Royal ballet: Margot Fonteyn, Alicia Markova, Ninette de Valois, Beryl Grey, Tamara Karsavina, Moira Shearer, Svetlana Beriosova, Violetta Elvin, Nadia Nerina -Vaganova: Galina Ulanova, Maya Plisetskaya, Natalia Dudinskaya, Olga Spessivtseva, Tamara Karsavina, Alla Shelest, Marina Semyonova
이후 1960-1970년대는 과도기적인 느낌이고, 1980년대부터는 확실히 우리에게 익숙한 발레리나의 느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전 발레리나들은 지금의 발레리나에 비해 실력이 떨어지는 아마추어 같은 존재인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전 발레리나들의 사진을 보면 비록 테크닉적으로는 지금에 비해서 뒤떨어져 보이지만, 우아한 기품과 고혹적인 매력은 절대 뒤지지 않는다. 그들을 보면서 발레의 본질은 그저 턴아웃이 잘 돼서 예쁜 다리 라인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성을 갖고 관객을 감동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전 발레리나들의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는 잠시나마 '내가 옛날에 태어났더라면 턴아웃에 대해 스트레스받지 않고 춤출 수 있지 않았을까? 저 시대에는 나 정도도 턴아웃이 잘 되는 편이었을 것 같은데.'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발레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달으니 이런 생각이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즉, 지금까지 600여 년간 발레를 이끌어온 원동력은 단순히 화려한 테크닉이나 쭉 뻗은 다리라인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예술혼인 것이다. 예술가로서의 '표현력, 음악성, 쇼맨십, 무대 위에서 그 모든 것을 끌고 가는 프로의식', 그런 것들이 결국 발레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태초부터 발레는 지금과 같이 완벽한 테크닉을 구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발레가 가치 없는 것이 아니다. 비록 테크닉적인 면에서는 부족했더라도, 무용수들의 예술혼과 표현력이 관객을 사로잡고 매료시키고 발레의 가치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발레를 발레답게 이끌어 온 핵심 에너지는 테크닉이 아니라 예술성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테크닉은 더 큰 감동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써 점점 더 발전한 것이다.
발레의 본질은 누가 누가 더 턴아웃이 잘 되는지를 겨루는 것이 아니라, 그걸 수단으로 해서 나의 표현을 하는 것, 나의 주관을 갖고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 명확히 아는 것, 그래서 궁극적으로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다. 발레는 효율성만 따지는 팍팍한 현대사회에서, 촉촉한 감수성을 일깨워주고 서정성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창구인 셈이다. 이것이야말로 취미발레인이자 발레 관객으로서 발레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유익함이 아닐까? 이를 통해 팍팍한 삶이 조금이나마 풍요로워지고, 새로운 원동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무용수가 자기 유용감을 느끼는 원천이 될 것이다. 물론 철저한 기본기와 테크닉은 발레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하다. 하지만 발레를 잘하기 위해서 강박적으로 테크닉-턴아웃에만 매몰되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예중 재학 시절, 발레 선생님께서 '너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 것 같니?'하고 질문하셨는데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선천적으로 턴아웃이 잘 안 돼서요.'라고 대답했었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내가 보기에 너의 턴아웃은 그렇게까지 안 되는 것이 아닌데. 너 스스로를 그렇게 딱 가둬두고 있구나.'라고 답하셨다. 당시에는 선생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턴아웃을 너무 신성시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여긴 나머지 힘닿는 데까지 극복해 볼 엄두를 못 냈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 나는 진로를 변경했지만, 어떤 대상을 필요 이상으로 큰 존재로 느끼고 두려워하느라 정작 실체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회피하는 습관이 생겨버린 것 같았다. 턴아웃을 천천히 살펴보며 다시 첫 단추를 잘 꿰어보려 한다. 나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고 스스로를 위로해 주며, 앞으로의 성장 과제들도 확인할 수 있다니, 참 유익하지 않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