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 박동훈의 명대사를 통해 뒤늦게 세상의 이치를 깨닫다
퇴사 초기, 극심한 번아웃에 시달렸다. 연초 해외에서 열린 시상식 진행 후 소진한 체력이 9월 말까지 회복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모든 건강 지표가 기준 이하였다. 멘탈이라고 온전할 리 없었다. 억울한 해고라는 소문이 났는지 출입처 곳곳에서 위로 모임이 생겼다. 2달 가까이 술만 마셨다. 5Kg의 지방은 덤이었다.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당시 유행하던 러닝을 시작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탄천 조깅 코스를 엉금엉금 뛰었다. 유난히 화창했던 10월의 마지막 날, 90분간 하타요가를 한 뒤 가을을 그냥 보내기 아쉬워 한강까지 자전거로 달렸다. 제대로 정비하지 않은 자전거의 안장이 삐걱대더니 아래로 쑥 내려갔다. 키에 맞지 않는 자전거를 오래 탔더니 무릎이 시큰댔다.
11월 첫날, 거짓말처럼 기온이 하강했다. 연이은 운동에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팠지만 이불을 박차고 달렸다. 그 이후 내 무릎은 접히지 않았다. 훗날 MRI를 촬영해보니 무릎이 부분파열됐다는 진단이 나왔다.
무릎이 아파 걸을 수 없으니 집에만 머물렀다. 우울함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할 수 있는 건 넷플릭스로 시간을 떼우는 것이었다.
뭘 볼까 고민하다 ‘나의 아저씨’를 골랐다. 남자들의 인생교과서 같은 드라마, 소설 ‘연금술사’의 파울로 코엘료 작가도, 일본의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도 홀딱 반했다는 작품이다. 드라마를 전혀 보지 않았던 한 남자 선배조차도 이 드라마를 보고 울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이 드라마가 방송될 때는 특유의 칙칙한 분위기 때문에 전혀 끌리지 않아 멀리했다.
주인공 박동훈은 인생에서 모험하지 않는 삼안E&C의 안전진단팀장이다. 안전진단팀이라는 게 잘해봐야 본전이고 못하면 욕만 먹고 모든 책임을 뒤집어써야 한다. 그럼에도 그는 특유의 온건한 성품으로 팀을 이끈다. 자신이 맡은 책무는 성실히, 자신의 공을 가로채는 선배 앞에서는 허허실실, 후배의 잘못은 최대한 덮어주는...이상적인 리더이자 호구. 그게 바로 박동훈이다.
대학후배 도준영이 대표이사로 선임됐고 심지어 자신의 아내와 정분까지 났다. 박동훈이 상무 후보로 거론되자 도준영 라인의 윤상무 등이 알바생 이지안을 내세워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도청하며 감시한다. 설상가상 박동훈이 거래처에서 5천만원 뇌물을 받은 것처럼 조작하려 했다. 하지만 박동훈의 따뜻함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기 시작했던 지안의 활약으로 이 사건은 일단락됐다.
지안은 동훈에게 “도준영은 왜 그랬대요”라고 묻는다. 동훈은 “내가 싫었나보지”라고 답한다.
“그런다고 막 자르나.”
“회사는 그런데야. 일 못하는 순으로 잘리지 않아. 거슬리면 잘리는거야.”
해고당하기 전까지 박동훈의 대사는 드라마 속 대사일 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어처구니없이 해고를 당하고 보니 박동훈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절절하게 와닿았다.
자랑은 아니지만 제법 쓸만한 기자였다. 회사를 함께 리빌딩하자는 국장의 제안에 몸을 갈아넣었다. 시상식 섭외는 각 사의 자존심을 건 총성없는 전쟁이다. 타사는 전사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움직였지만 그런 지원이 전무한 상황에서 홀로 발을 동동 구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눈꼴시어했던 이들은 경영진의 낙하산이었다. 시상식은 신문사의 최대 수익사업인만큼 섭외가 관건이다. 매번 맡은 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해, 가는 곳마다 원성을 들었던 낙하산이지만 그 롤이 굉장히 그럴싸해 보였는지 욕심을 냈다.
하지만 출입처 인맥이 전혀 없던 그가 섭외 업무를 성공적으로 해낼리 만무했다. 한동안 업무에서 배제됐던 그는 경영진의 농간으로 주요 보직을 맡으며 본색을 드러냈다. 확인된 바는 없지만 회장 라인, 이른바 성골인 그가 시상식 주요 실무자인 나를 굉장히 못마땅해했다는 뒷말이 전해졌다. 그렇다. 일을 못해서가 아니라, 거슬려서 잘린 것이구나. 이 중요한 사실을 드라마를 통해 깨달았다.
최근 회사 소식을 들어보니 그는 셀프로 본부장 직함을 달았다 한다. 참고로 나의 전 직장에는 ‘본부장’이란 직함이 없다. 오랜 역사를 지닌 언론사, 정도를 걸어야 할 언론인들 사이 떨어진 낙하산 미꾸라지가 여러 사람의 청춘을 바친 회사를 망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