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NELL)이 넬을 넘었다”

26년차 밴드 넬(NELL)의 온고지신(溫故知新)

by mulgae

밴드 넬(NELL)하면 떠오르는 곡은 단연 ‘기억을 걷는 시간’이다. 2008년 발표된 정규 4집 ‘Separation Anxiety’ 수록곡이었던 이 곡은 인디신의 총아였던 이들을 단숨에 메인스트림에 올려놓았다. 누구나 겪었을 법한 청춘의 사랑과 서사를 그린 이 곡은 발표 20여 년이 지났음에도 수많은 청춘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고 있다.


명곡을 가진 밴드의 비애는 여기서 출발한다. 실상 넬의 음악은 명확하게 스토리가 있고, 기승전결이 뚜렷하다. 특히 4집 ‘Separation Anxiety’에서 군 입대 직전 발표한 ‘The Trace’ , 그리고 제대 후 발표한 정규 5집 ‘Slip Away’로 이어지는 서사는 한편의 책이나 드라마같은 또렷한 전개를 보인다.


전곡이 타이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Separation Anxiety’의 고통스러운 열병을 지나 풋사랑 같은 ‘The Trace’의 ‘Part1’, ‘Part2’로 이어지는 겨울 서사는 ‘Slip Away’의 덤덤한 ‘Go’로 마무리된다. 20대의 뜨거웠던 사랑도 30대가 되면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게 인생의 순리라는 것을 보컬 김종완은 특유의 담담한 어조로 노래한다.


아쉽게도 ‘기억을 걷는 시간’의 메가 히트로 넬의 추후 행보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물론 활동은 여전히 활발하다. 총 9장의 정규앨범을 발표했고 국내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를 장식하곤 한다. 매 연말 콘서트에는 1만명 가량의 관객이 운집한다. 그럼에도 오랜 스테디셀러로 사랑받았던 ‘기억을 걷는 시간’을 뛰어넘는 곡을 선보이진 못했다. 넬의 경쟁자는 과거의 넬 자신이었던 셈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넬을 아꼈던 한 음악 관계자는 “예전만큼 곡이 나오지 않잖아”라고 지적했다. 그 말에 선뜻 동의하기도, 동의하지 않기도 힘들었다. ‘예전만큼 곡이 나오지 않는다’는 지적을 듣기에 그들은 너무 많은 곡들을 축적하고 발표했다. 다만 제 2의 ‘기억을 걷는 시간’을 내지 못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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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40대 중반인 넬이 ‘기억을 걷는 시간’에 머물러야 할까. 2일부터 11일까지.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열린 넬의 어쿠스틱 콘서트 ‘Still Sunset’은 이 밴드가 지향하는 바를 명확히 드러내는 자리였다. 2001년 발표한 ‘조금은 슬픈 이야기’부터 ‘인어의 별’(2003), ‘파트1’, ‘파트2’(2008) 등 넬의 초창기 히트곡들이 새 옷으로 갈아입고 팬들에게 선보여졌다.


실상 지난해 데뷔 25주년 기념 인터뷰 자리에서 보컬 김종완은 “과거로 타임머신을 탄다면 앨범의 아쉬운 부분들을 수정하고 오고 싶다”고 했다. 그는 “안 그래도 2~3달 전부터 과거 발표한 곡 중 바로 잡고 싶은 곡들을 모아 편곡을 새로 하는 작업을 기획 중이다”고 설명했다. 인터뷰 시점인 7월 21일부터 2~3달 전이니 이들은 이미 1년 전부터 이번 콘서트를 준비했던 셈이다. (https://m.entertain.naver.com/home/article/468/000108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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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 콘서트를 한 번이라도 본 관객이라면, 페스티벌에서 이들의 음악을 접해 봤다면 이들의 록킹한 에너지에 놀라곤 한다. 이번 콘서트는 록킹함보다 사운드의 조화에 중점을 뒀다. 공연이 열린 유니버설 아트센터는 80년대 건립됐지만, 지금까지 국내 그 어떤 공연장보다 손꼽히는 음향시설을 자랑한다. 대관조차 쉽지 않은 곳이다.


오프닝을 연 ‘인어의 별’은 세기말의 우울함을 간직한 곡이다. 넬을 ‘한국의 라디오헤드’로 각인시켜준 곡들 중 하나기도 하다. 거칠지만 풋풋한 기타소리와 채 소년미를 벗지 못한 보컬의 샤우팅이 어우러진 이 곡을 넬은 어쿠스틱한 기타 사운드에 잔잔한 키보드음으로 재해석했다. 22년의 시간을 거쳐 숙성된 보컬의 덤덤함이 곡 특유의 쓸쓸함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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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공연 편곡의 특징은 반전의 매력이다. 첫사랑을 상실한 아픔을 노래했던 ‘Part1’과 ‘Part2’는 묵직한 피아노 반주로, 디스코와 록을 합친 듯한 정규 8집 수록곡 ‘Love it when it rains’는 다크한 매력을 지닌 편곡으로 재탄생했다.


비교적 최근 발표한 정규 9집 수록곡 ‘Don’t say love me’는 제목과 달리 사랑스러운 보사노바풍의 옷을 입었다. 페스티벌 단골 곡인 ‘1:03’의 변신도 놀라웠다. 넬을 상징하는 곡들 중 하나인 이 곡이 익숙한 기타 리프를 벗어나 낯선 기타 전개로 다가왔을 때의 놀라움이란 뭐라 형언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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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의 질주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엔딩곡으로 소개한 ‘조금은 슬픈 이야기’의 웅장한 사운드와 그에 걸맞는 샤우팅은 원곡의 병약한 소년미를 잊게 했다. 가성과 진성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김종완의 절규하는 듯한 보컬의 진가가 이 곡에서 마음껏 뿜어져 나왔다.


오랜 시간을 거쳐 수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던 ‘기억을 걷는 시간’은 오롯이 건반 한 대와 김종완의 보컬만으로 담담하게 그려졌다. 이토록 먹먹한 ‘기억을 걷는 시간’이 또 있을까. ‘조금은 슬픈 이야기’의 절규를 단박에 잊게 했다.


무엇보다 이날의 화룡점정은 ‘Counting Pulses’였다. 팬들에게 ‘맥박세기’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이 곡은 정규 3집 ‘Healing Process’ (2006) 수록곡이다. 김종완의 성스러운 건반으로 출발한 ‘Counting Pulses’는 김종완의 가성과 고태영의 열정적인 기타 리프, 양혜승의 드럼비트가 어우러지며 19살 먹은 곡의 성인식 전야제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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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점들로 정교하게 표현하는 점묘화처럼 각 악기의 소리들이 점점이 모여들었다 고태영의 기타로 폭발할 때는 흡사 아이슬란드 밴드 시규어로스를 연상케 했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긴장감이었다. 이번 공연을 위해 세션으로 참가한 고태영과 양문희가 곡의 완성도를 높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60분에 걸쳐 진행한 이번 공연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 그들은 1년에 걸쳐 공연을 준비하고, 또 준비해 왔을 터.


누군가 내게 “너는 넬을 왜 좋아해?, ‘기억을 걷는 시간’말고 뭐가 있어?”라고 묻는다면 자신있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넬은 ‘기억을 걷는 시간’을 뛰어넘은 대한민국 대표 밴드야.” 과거의 자신을 뛰어넘었다는 것만으로 그들은 리스펙트받을 자격이 충분한 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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