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Prologue (2) - 창조성에 대해서
여기까지 글을 따라오고 있는 분들이라면 당연히 아티스트웨이라는 책을 실제로 읽어보시고 모닝페이지를 어찌어찌 하루 이틀은 해봤을 것이라고 의심치 않는다. 혹시나 아직도 시작해보지 않으셨다면, 내일 아침에라도 꼭 시작하시길 바란다.
자, 오늘은 창조성이란 단어에 대해서 좀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예술가들의 전유물처럼 보이는 이 단어는 참 신비스러운 구석이 있어 보인다. 뭔가 마약이나 술이나 여자/남자에 미쳐 돌아가는, 그런 중독들이 아니라면 뭔가 정신적으로 온전치 않아 보이는 그런 극단적인 사례들이 떠오를 것이고, 저 창조성이란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곁다리로 붙는 조건들이 너무나 많아 보이지.
이런 모든 종류의 편견과 신비주의들을 잠깐 옆으로 치우고, 신의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혹시나 특정 개념의 유일신 같은 것을 생각하고 불편해하신다면 거기에 여러분이 조금 더 친근해할 만한 다른 존재를 대입해도 전혀 상관없다. 나 또한 특정한 신을 염두에 두고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신들은 우리가 잘못하면 벌주고 혼내는 꽤나 무서운 부모님 같은 존재지만, 창조성에 대해서만은 약간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사실 여러 경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생각은 남들에 의해 주입된 경우가 꽤나 많지. 한번 시간을 내서 여러분의 신에 대해 생각해 보라. 어떠한 신인가?
참고로 물고기씨 같은 경우에는, 신은 자애로운 나무 성모마리아와 같다. (가끔은 혼자 기도 올릴 때 나무씨 나무씨 제 이야기 좀 들어봐요(쾅쾅) 하고 부르기도 한다) 샤르트르 성당에 기회 될 때마다 기도 올리러 가는데, 내가 사는 동네에서 거기까지 가려면 꼬박 반나절을 바쳐서 가야 하는 거리다. 21세기에 온갖 교통수단이 발달한 상황인데도 이 정도면, 옛날에는 며칠이 걸렸을 것인가?
그렇게 성당에 도착해서 그 안에 모셔진 나무성모님의 상 앞에서 묵상하고 있노라면 마치 그 성모 마리아께서 내 옆에 앉아서 “안녕? 왔구나.” 라며 미소 지으며 손을 잡아주시는 듯한 착각마저 들기도 한다.
신께서 사랑이 넘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여러 방법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 재능을 쥐어주실 이유가 전혀 없다.
조금 더 생각해 본다면, 창조성이란 것은 온 우주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이기도 하지. 나뭇가지들이 자라나고 잎들이 자라나고 마침내는 꽃이 맺히는 모양이라던가, 눈송이들을 확대해서 보았을 때 보이는 기하학적인 결정체들이라던가, 물이 소용돌이칠 때에 그려지는 곡선들이 겹치는 모양들을 본다면 나의 의견에 동감할 것이다.
우주의 모든 것들이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하고 인간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그러한 ‘표현하고 싶어하는 욕구‘ 에는 자연스럽게 힘이 생겨나게 된다.
그런데 어쩌면 의문이 생겨날 수도 있다.
이것이 왜 신이 쥐어주신 선물이냐고?
가끔은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는 게 도움이 될 때도 많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언론검열, 지식인 탄압, 문화유산 파괴 등등의 일들을 보라.
창조성이란 재능은 사람을 움직이고 끌어당기는 아주 위험한 힘을 가졌기 때문에, 어떤 집단들은 그 창조성이 가져오는 나비효과를 두려워하여 여러 방법으로 그것을 억누르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가진 자들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화검열이 심각하던 구소련시대에도 아흐마토바 여사님의 피를 토해내는 시들은 비밀스러운 경로를 통해서 사람들이 구해서 읽고 찬양하고 음악으로 표현하기도 했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쓰고, 읽고, 찬양했던 것이다. 저 시대는 전화상으로 말 한마디만 잘못 나가도 그다음 날 어디론가 사라지던 시대였다고.
생명의 위협에 직면해서도 창조성은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감추지 않는다. 이 얼마나 굉장한 힘인가.
이 창조성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재능이다. 개인 간의 차이는 당연히 존재하지만 창조성이라는 것은 틀림없이 존재한다. ‘아, 난 정말 센스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어’ 라고 하는 사람조차도 바이칼 호수의 광활한 풍광이나 야생화들이 가득한 탁 트인 초원, 혹은 철새들이 무리 지어 날아다니는 바닷가를 마주 보면서 어떤 형태로든 감탄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창조성은 그림을 잘 그리거나 악기를 하거나 같은 그런 종류의 실제적인 행동이 아니라, ‘나의 본성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차리고, 그것에 대해 나만의 방식으로 반응하는 본성‘ 이다.
어떠한 사건, 어떠한 사물, 어떠한 행위를 통해 내가 ‘나는 이렇다/저렇다라고 느끼고‘ 나면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그 느낌을 표현하고 싶어 지지.
예를 들면, 맛있는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고 나서,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음, 맛있어!” 하는 감탄과 황홀한 표정이 나오는 것과 같다.
이제 여기서 내가 정말 감탄했다면, 그저 단순히 찰나에 사라지는 말과 표정만으로 끝내지 않겠지?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핸드폰을 들어서 사진을 정성 들여 찍고 그것을 아름다운 글과 함께 sns에 올릴 것이다.
여기서 뭔가 느껴지는 게 없는가? ‘사진을 찍고’, ’아름다운 글’을 곁들여서 ’다른 사람들에게 표현한다‘ 라...
바로 이게 내가 말하고 싶은 창조성이다. 이것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일 뿐만 아니라, 어떻게든 꽃을 피워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불가항력적인 힘이다. 그래서 신이 주신 것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런데 왜 이 재능이 ‘말라붙는‘ 것인가?
왜 내가 만들어내는 음악에서 생동감을 찾을 수 없는 것인가? 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두려운 것인가? 왜 글을 쓰기 위해 종이와 펜을 대면하는 것마저 기피하는 걸까? 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는 말을 소리 내어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것일까?
여러분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현재 이 글을 쓰고 있는 물고기는 창조성이 바싹 메말라있는 상태이며,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이 아티스트웨이를 다시 펼친 것이란 사실이다.
물고기씨 또한 몇 년 만에 모닝페이지를 다시 써 내려가고 있다. 아직 ‘새롭고 강력한 음악’ 의 길은 멀고도 험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인걸. 조금만 느긋해져도 늦지 않아.
모든 풀잎은 고개를 숙여 귀에 대고 “자라라, 자라라” 라고 속삭이는 천사를 가지고 있다 - 스텔라 테릴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