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구나무서서 생각하기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사장은 나를 데리고 거래처 임원을 만나러 갔다.
그 임원은 대리 한 명과 함께였고, 사장과 임원은 안에서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그 대리와 함께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나에게 많은 조언을 해줬다.
나이는 나보다 훨씬 어렸지만, 사회생활에서는 나보다 한참 선배였다.
다음 날, 사장은 나에게 그 대리가 어땠냐고 물었다.
“좋았습니다. 말도 잘 통하고, 저를 잘 이해해 주는 것 같아요.”
그러자 사장은, “잘됐네. 그럼 둘이 따로 만나봐. 본사 직원이랑 친하게 지내두면 몇 배로 돌아오는 거야.”
억지로 만날 필요까지야 싶었지만, 사장은 “무조건 연락해서 술 한잔 해”라며 등을 떠밀었다.
얼마 후, 나는 그에게 연락을 했고 사장이 직접 장소를 정했다.
“접대는 무조건 비싼 데서 비싼 거 먹여야 해. 그래야 써먹을 수 있어.”
그렇게 처음 만남이 이루어졌고,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그가 이미 계산을 마쳐버린 게 아닌가.
“안 됩니다. 이건 제가 접대하는 자리입니다.”
그러자 그는 나를 똑바로 보며 이렇게 말했다.
“팀장님, 지금 저 접대하려고 만나신 거예요?
전 그냥 팀장님이랑 한잔하고 싶어서 나온 건데요.”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진심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는 “오늘은 제가 장소 정할게요. 대신 무조건 반띵입니다”라고 했다.
머릿속엔 여전히 '접대는 내가 비싼 데서 사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있었지만,
우리는 보신탕집에서 1차 반띵, 2차로 당구 한 게임까지 하고 헤어졌다.
그렇게 우리는 9년을 지냈다.
일 년에 두세 번, 자주는 아니었지만 꾸준히 만남을 이어갔다.
그는 어느새 대리에서 차장이 되어 있었다.
회사가 어려운 일이 생기자, 사장과 부장은 그에게 연락해서 해결을 부탁하라고 시켰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었다.
그는 거절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날 이후
그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안고 살게 되었다.
그와 만날 땐 사장에게 미리 보고했다.
사장은 의심이 많고, 상대 약점을 잡아 이용하는 사람이었다.
괜히 딴짓한다고 오해받을까 봐, “그와 약속 있다”라고 늘 먼저 말해두었다.
그러면 사장은 “비싼 데 가서 비싼 거 사 먹여”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와 늘 저렴한 곳에서 조용히 한잔 했다.
어쩌다 마땅한 장소가 없으면
사장도, 부장도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내 작은 원룸에서 소주 한잔 기울이기도 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하청 공장에는 절대로 측은지심을 가지지 마세요.”
그 말을 퇴사한 지금,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나는 지금, 그때보다 더 아래로 내려왔지만
그는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래도 그와는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는다.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 유일한 ‘거래처 갑’이다.
갑이지만 갑 같지 않은, 그런 사람.
만약 그가 나를 대접받을 목적만으로 만났고,
나 또한 그를 계산적인 이유로 접대했다면
지금까지 이런 인연이 유지될 수 있었을까?
물론 세상엔...
사장처럼 비싼 걸 사 먹여가며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처럼 대접받는 마인드가
진심을 더 오래 붙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보다 어린 그는
지금도 내가 인생에서 가장 잘 만난 ‘사회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