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근'미래 SF를 좋아한다. 자동차가 날아다니고 로봇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조금) 먼 미래를 그리는 SF도 좋아하지만, 어쩌면 '있을 법'한, 내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다 보면 언젠가는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를 상황을 그리는 작품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블랙 미러", "이어즈 앤 이어즈"와 같은 작품들을 즐겨보았는데, 최근 우연히 "박성실씨의 사차 산업혁명"이라는 작품을 보게 되었다. 이 작품은 tvN의 <드라마 스테이지 2021>라는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단막극이다.
작품 소개: 박성실씨의 사차 산업혁명
AI상담원에 맞서 마지막까지 싸우는 인간상담원 주인공 3인방 © tvN
줄거리. 콜센터 상담원 박성실 씨는 무지각, 무결근에 10년 근속상까지 받은 성실한 직원이다. 하지만 AI 상담원 도입으로 90%에 달하는 인원을 해고한다는 통보를 받는다. 트럭 운전사로 일하던 남편도 자율주행 도입으로 해고당한 상황이라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는 성실 씨. 어느 날, 성실 씨는 완전무결하다고 생각한 AI의 약점을 우연히 찾아내고 일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
줄거리 출처: 씨네21 http://www.cine21.com/db/tv/info/?tv_id=21700
사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풍경?
주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도 같이 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작품에서 그리는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미래 (혹은 현재)는 쌔드 엔딩이다. 인간 상담원들은 AI상담원에게 밀려 직장을 잃는다. 박성실 씨의 남편 박철수 씨 역시 자율주행 기술에 밀려 직장을 잃는다. 그는 자율주행 자동차를 마구 두드리며 절규한다. 나도 "같이 살자"고.
AI상담원의 등장으로 인간상담원의 90%가 해고된다. © tvN
극 중에서 콜센터에서 일하는 인간 상담원의 대다수가 해고된다. 해고를 피한 소수의 인원은, VIP 고객의 상담을 맡는다는 설정이다.
예전에 이와 비슷한 예측을 들은 적이 있다. 로봇시대가 오면 가난한 사람이 로봇을 사용하게 될 거라고. 청소하는 로봇, 간병을 하는 로봇 같은 것들은 정부에서 대량 구매를 해서, 빈곤층,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의 일환으로 사용될 거라고. 그리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들은 청소하는 '사람', 간병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서비스를 받을 거라고.
AI나 로봇이 인간 수준을 따라가지 못한 근미래에는 이런 예측이 맞을 것 같다. 하지만 먼 미래, 기술이 발전하여 인간 상담원과 AI상담원을 구분할 수 없다면, 그때도 VIP들은 인간 상담원과 대화하길 원할까? 전화주문보다 앱으로 주문하는 게 편한 요즘 세대에게도 이런 예측이 그대로 적용될까? 대답보다는 질문이 많아진다.
과학 하나.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AI상담원"
AI상담원 때문에 빡친 고객. 그런데 상대방이 AI상담원이라는걸 모르는 눈치다. © tvN 극 중 한 장면. 보험회사에 전화를 거는 고객. AI상담원이 전화를 받는데, 이 고객은 상담원이 사람이 아니라 AI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눈치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고객. AI상담원에게 "너 이름이 뭐야!"라고 소릴 지른다.
지금 고객은 수화기 건너편 상담원이 사람인지 AI인지 구분을 못하는 상황이다. 다시 말하자면, 두 상담원 (인간 상담원과 AI상담원)의 차이를 못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AI상담원은 인간 상담원 수준의 상담 능력을 보여준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즉, 그 유명한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것이다.
튜링 테스트 (Turing Test). 기계가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가?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인간처럼 생각'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처럼 생각하다는 게 뭔지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튜링 테스트에서는 '인간처럼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는다. 대신, 장막 (혹은 수화기) 너머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이 인간인지 기계인지 도통 모르겠다면, 그 둘의 차이를 느낄 수 없다면, 이때 기계는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Q. 극 중에 등장하는 수준의 AI상담원이 있을까? / 곧 나오게 될까?
A. 아직은 없다 / 아직 좀 더 기다려야 되지 않을까? (다른 이들은 생각이 다를지도 모르겠다). 극 중에서 AI상담원이 보여주는 능력은 사실 매우 고도의 기술의 조합이다. 고객의 질문을 듣고, 이해하고, 답을 찾으며 동시에 고객의 감정을 살핀 후, 대답을 음성으로 만들어 내기까지 해야 한다. 이처럼 각각의 기술들을 다 잘하는 AI를 범용 AI, 범용 인공지능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AGI)이라고 부른다.
현재 대부분의 AI는 잘하는 영역이 한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음성 인식을 하는 잘하는 AI는 그 음성에 실린 감정을 모르고, 음성을 만들어 내는 AI는 그 음성이 담고 있는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최근 많은 연구가 범용 AI,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AI를 만들기 위해 진행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AI를 생각하면 곧 '다 잘하는 인공지능'을 만나게 될 것 같지만.. 내 생각엔 그렇게 빨리 볼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다음 기회에 소개해보겠다).
상상 하나. 가장 인간적인 인간
"가장 인간적인 인간"이라는 책에서 얻은 생각으로 상상하며 쓴 글.
인간 상담원의 대부분은 해고된 미래. 대부분의 고객은 AI상담원과 연결되고 오직 극소수의 VVIP들만이 인간 상담원과 연결된다.
그러던 어느 날, 시스템의 실수로 일반 고객의 문의가 인간 상담원 박성실 씨에게 연결이 되는데.. 하지만 고객은 지금 상담을 해주는 박성실 씨가 인간이 아니라 AI라고 생각하는 눈치다.
"고객님, 저 사람이에요. 상담원 박성실입니다."
아무리 고객에게 이야길 해도 고객의 반응은 'AI 진짜 사람 같네'라는 반응뿐.
AI상담원들의 틈에서, 이제 박성실 씨는 본인이 인간임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누가 더 인간 같은가? 인간'적'인 AI와 인간인 인간의 대결. 박성실 씨는 수화기 너머 고객에게 본인이 인간임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상상 둘. 로봇의 권리 (Rights of Robot)
자율주행차는 '본인(?)'을 막아선 박철수 씨를 장애물로 인식하고 경찰에 신고를 한다 © tvN
극 중 한 장면. 자율주행을 하던 트럭이 박철수 씨를 발견하고 멈춰 선다. 박 씨가 자동차에 위해를 가하자 자율주행 트럭은 자동으로 112로 신고를 하는데..
어떻게 보면 극적인 장면이다. 로봇(자율주행 자동차)가 사람을 경찰에게 '신고'하다니. 심지어 출동한 경찰은 자율주행차를 막아선 박철수 씨를 연행해간다. 로봇도 신고할 수 있는 '지위'를 가지게 된 걸까?
자연의 권리 (Rights of Nature) 소송에서는 자연물이 법정에서 인간과 같은 동등한 자격을 가지는지가 중요 쟁점 중 하나이다. 쉽게 말해서, 도룡뇽이나 실개천과 같은 자연물이 원고의 자격으로 재판을 걸 자격이 있냐는 것이다.
2005년 경남 양산시 천성산의 도룡뇽은 그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다 [1].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2021년. 미국 플로리다의 개울, 호수, 습지 (marshes)는 부동산 개발자들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2].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지난 후 로봇의 권리 (Rights of Robot) 소송이 나타날까? 로봇이 원고의 자격으로 소송을 제기하는 그런 상황이 올까?
[1]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160245
[2] https://www.theguardian.com/environment/2021/may/01/florida-rights-of-nature-lawsuit-waterways-housing-development
덧. 유독 (나만) 신경 쓰이는 장면 두 개
극 중에서 제일 비현실적인 장면은 수트차림의 AI개발자들이다. © tvN 장면 1. CEO 사무실 바로 아래층에 위치한 AI 연구소. 다들 하얀 셔츠에 수트 차림이다. 게다가 모니터는 하나씩밖에 안 쓴다. 작품에서 제일 비현실적인 부분이랄까? :)
물 셀프? © tvN 장면 2. 극 초반에 서빙 로봇이 음식점을 돌아다니는 장면을 보여준다. 다른 장면 식당 벽에는 "물 셀프"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서빙 로봇의 시대에도 물은 여전히 셀프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