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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영 May 09. 2019

사박사박, 눈의 마을 시라카와고

일본 소도시 여행

사박사박, 다리에 힘을 주고 종종걸음을 한다. 크고 작은 발자국이, 쉼 없이 내리는 눈에 금세 흔적을 잃는다. 웅성이는 사람들의 소리, 그로 인한 거리의 활기 모두 함박눈에 파묻힌다. 눈이 만든 고요함과 차분함, 흐릿한 시야 속 유일하게 선명한 것은 내게서 만들어지는 소리와 촉각. 입김을 뱉어내는 살짝 벅찬 숨소리, 따뜻한 숨이 닿아 촉촉해진 목도리 안쪽, 바닥에 쌓인 눈을 즈려밟는 뽀드득 소리와 발 끝의 폭신하고 재미난 느낌.



本当に見たかった。

(혼토니 미타깟따)

2018년 12월, 한국에선 이미 기록적인 대설이 지난 이후였다. 나는 '시라카와고'라는 마을에 가기 위해 나고야행 비행기에 올랐다. 평소 일본의 교토와 같이 예스러움과 그로 인한 정서가 고스란히 남겨진 도시를 좋아한다. 때문에 틈이 나면 '소도시' '고즈넉' 등의 키워드로 여행지를 물색(?)해보곤 한다. 그러다 언젠가 어느 산속 마을 '시라카와고' 모습에 마음이 홀려버렸다. 줄 지어선 세모 지붕 집 위에 마치 카스테라 처럼 포동한 눈이 쌓여있었다. 동화 속 요정이 살 듯한 마을이었다.


영화 러브레터 속 주인공이 훗카이도 비에이 시의 설원에서 "오겡끼 데스까-"를 외쳤다면, 난 시라카와고의 눈 쌓인 갓쇼즈쿠리 아래에서 "혼토니 미타깟따 (정말 보고 싶었어)."라고 외치고 싶었다.


산속 깊은 마을, 시라카와고.

시라카와고는 나고야에서 버스로 세 시간 거리의 깊은 산속에 있는 마을이다. 우리는 그곳에 조금 더 오래 머물기 위해, 시라카와고와 인접한 도시 다카야마에 전날 미리 짐을 풀었다.

이른 아침, 호텔 밖을 나서자마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살짝 걱정되는 마음으로 버스를 타러 걸어갔다. 설경을 보러 각국의 사람들이 찾는 곳이지만, 오히려 눈이 많이 내리면 가는 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우려와 달리 버스는 시라카와고로 무탈히 출발했고, 산길을 따라 한 시간 정도 힘차게 달렸다. 산속을 깊이 파고들어 목적지에 다다라갈 때쯤, 길고 짧은 터널이 계속되었다. 눈발도 점차 거세졌다. 터널을 하나씩 뚫고 나갈 때마다 밖의 장면도 빠르게 하얀색으로 덮여갔다. 그럴수록 목적지에 대한 기대감은 증폭되었다. 어린 시절, 겹겹이 포장된 선물 박스를 뜯어보던 설렘 비슷한 마음이었다.


눈의 마을, 시라카와고.

버스에서 내려 마을의 중앙 거리로 조금 걸어가자 세모 지붕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가옥의 형태를 '갓쇼즈쿠리'라 한다. 목재로 뼈대를 만든 뒤 못 없이 억새로 층층이 엮어 올린다. 일본의 폭설지역에서 택하는 건축방식으로, 지붕의 경사가 심한 이유 역시 폭설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갓쇼즈쿠리 가옥의 발달이 기후 때문만은 아니다. 고립된 산악 지대에 위치한 시라카와고는 농작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때문에 1600년대부터 1970년대 까지, 누에를 키워 비단을 만드는 양잠업이 마을의 생업으로 자리 잡았다. 이때 양잠에 필요한 자재를 저장하기 위해 지붕 안의 커다란 공간을 2~4단으로 나눠 사용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지붕 모양이 마치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합장촌'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시각적으로 진귀한 이 마을은, 1995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끝이 안 보이는 길이 마을을 가로지른다. 길 양측엔 기념품점, 각종 먹거리 가게가 줄지어 있다. 기념품 가게를 드나드는 관광객들, 천천히 거닐며 풍광에 감탄을 자아내는 사람들로 거리에 활기가 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금세 눈 속에 파묻혀 고요하게 느껴진다.

길가에서 조금 안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실제로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는 민가가 있다. 그들의 흔적은 마을에 생동감을 더한다. 카메라에 담지 않을 수 없었다. 뷰파인더로 이곳의 삶을 바라보고 있자니 꼭 시간이 멈춘 듯했다.


몸을 녹이는 가장 행복한 방법.

눈으로 한 번, 뷰파인더로 한 번. 번갈아가며 관찰하다 보면 시간이 배로 간다. 카메라를 쥔 손은 점점 빨갛게 변해 감각이 무뎌졌고, 신발 앞코에 닿은 눈이 녹으면서 발가락이 차갑게 얼어 아파왔다. 잊고 있던 몸의 감각을 확인하고선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곤 마을 깊숙이 있는 한 음식점에 들어섰다. 추위를 녹이는 가장 행복한 방법이 있다면 그건 분명 따뜻한 음식을 마주하는 것일 테니까. 우리는 등유 난로를 등 뒤에 두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난로에선, 나무 의자에 대충 걸어둔 겉옷을 태울 듯 후끈한 불길이 일었다. 텐푸라를 올린 메밀 소바와 된장 소스를 곁들인 미소 카츠. 후끈한 열기 속에서 콧물을 훌쩍이며 배를 채웠다. 시라카와고가 속한 주부 지방은 된장이 특산품이다. 그만큼 된장의 종류가 많고, 이를 활용한 음식 또한 다양하다. 그래서인지 다른 지역의 음식보다 대체로 짜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쉽사리 젓가락을 내려놓기 힘들었다. 내가 알던 된장이 아닌 낯선 맛이었다. 시원할 정도로 깊고 담백해 구미가 당겼다. 시원하게 깊고 담백한 짠맛이라.. 이런 맛이 있을까 싶지만 정말 그랬다. 적당히 기름진 돈가스에 된장 소스를 묻혀 한 입 무니 체력이 충전되는 듯했다.


풍광을 한눈에.

배를 든든히 채운 후 다시 마을 골목골목에서 샛길의 미학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골목에선 시야가 확 트였다. 시라카와고와 일렬로 평행하게 있는 '쇼가와'강이었다. 강 위론 기다란 돌다리가 지나고 있었다. 다리의 이름은 '만남의 다리'라는 뜻의 '데아이바시'. 합장촌과 '갓쇼즈쿠리 민가엔'이라는 야외 박물관을 잇는 역할을 한다. 앞, 뒤 사람이 조금만 세게 걸어도 다리가 흔들렸다. 눈이 녹고 쌓이고를 반복한 바닥은 몹시 미끄러워 조심하지 않으면 다치기 십상이었다. 두려운 마음에 고개를 내내 바닥에 고정한 채 종종걸음을 했다. 다리 끝에 도착해서야 고개를 드니 비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도록 마주하고 싶은 모습이었다. 눈이 씻기는 듯했다. 잠시 가만히 서서 마을 주민들은 어떤 마음일까 생각했다. 매일 마주하는 풍광일지라도 그들 역시 매 순간 마음이 홀려버릴까, 오히려 그들에게 눈은 불편을 일으키는 골칫덩이일까, 아무렴 겨울과 눈을 사랑하는 나로선 전자에 가까울 것이라 혼자 예상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 버스터미널로 돌아오는 길에 잊지 않고 전망대로 향했다. 마을 풍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는 버스터미널과 근접해있다. 포장된 산 길을 10분쯤 걸어 올랐다. 마침 다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난 거리와 골목, 나무 한 그루가 홀로 서 있던 설원, 지붕에 예쁜 새가 앉아있던 집 등을 흐릿한 시야 속에서 눈으로 천천히 짚었다. 굳이 마을을 다 돌고 난 후에 전망대에 오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영화 예고편을 보지 않고 극장에 들어간다면 장면 장면마다 호기심과 긴장을 놓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더욱 깊숙이 기억될 테니까. (때문에 시라카와고에 방문할 예정인 이라면 이 글 또한 보지 않길 바란다.)


아마 이는 성공인 셈이다. 이 곳에 다녀온 지 4개월 후인 지금도 여전히 그날의 장면이 생생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낮에만 따뜻함이 반짝 찾아오는 요즘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내 주변은 이미 두 계절을 넘어 하얀 세상이 된 듯했다. 이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눈 내리는 겨울날의 포근함이 잠시 찾아오길 바란다.




문화예술 플랫폼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

http://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1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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