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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영 Mar 04. 2021

아무 일도 없는 오늘

오늘도 무해한 하루가 지난다

오래된 한옥 마을을 혼자 걸었다.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는 좁은 골목을 지나면 내가 좋아하는 찻집이 있다. 산책 중에 잠시 쉬어가기 좋은 위치와 풍경. 찻집에 들어가기 위해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있으면 20대로 보이는 젊은 사장님이 천천히 눈을 깜빡, 눈인사를 하며 미닫이로 된 창호문을 드르륵 연다. “들어오세요~ 신발은 제가 정리할게요. 원하는 곳에 앉으세요.”


늘 인기 많은 창가 자리가 오늘은 비어있다. 창 너머론 삼청동 길과 북악산이 보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장마철과 햇살 좋은 날, 매콤한 바람이 부는 날까지 늘 다른 풍경일 것이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닥과는 18센티미터 정도의 틈이 있는 두툼한 나무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쭉 펴기에도, 양반다리를 하기에도 그리 편치 않은 자리. 무릎을 세워 안고 대충 쪼그리듯 앉았다. 위장에 좋다는 매화꽃차를 주문하고 창 밖을 봤다. 찻집 안에선 인기였던 드라마 ost, 젊은 싱어송라이터의 노래가 피아노 반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장님은 다도 식기를 조심스레 들고 와 앞에 앉았다. “아시겠지만, 차 내리는 방법을 보여드릴게요-” 먼저 매화꽃이 담긴 작은 유리 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반쯤 따르고 20~30초 정도 기다려야 한다. 곧 20초의 정적이 예상되었지만, 그는 정적을 깰 이야기를 빠르게 찾아냈다. 마침 오늘 아침에 찻집의 앞마당에 핀 매화꽃을 발견했는데, 세어보니 딱 네 송이였다 말하곤 차 내리는 방법을 마저 설명했다. 차를 여덟 번 정도 우려먹을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오늘 하루, 적어도 차가 여덟 번 우러나는 시간만큼의 여유가 내게 허락된 것 같았다.   


메밀차에 향이 진한 꽃을 떨어트린 맛. 약간 쓴 맛도 난다.


우러난 차를 한 모금 마시니 내가 좋아했던 드라마 ost가 역시 피아노 반주로 흘러나왔다. 젊은 사장님은 커플 손님, 외국인 손님, 모든 손님에게 눈을 맞추며 차 맛은 어떻냐 물었다. 내 찻잔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매화꽃 향, 들뜬 표정으로 차분하게 말하는 사장님의 말소리와 단조로운 피아노 소리, 가게 바로 앞과 건너편의 삼청동 길을 지나는 이들의 걸음, 빛의 양이 줄어들수록 변해가는 북악산 풍경을 온몸에 가만히 담았다.

해가 다 저버리기 전에 서둘러 나가야겠다 생각하곤 마지막 잔을 준비했다. 5번째 잔이었다. 차를 8번 우릴 때까진 시간이 꽤 많이 필요하구나 생각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치 휴식 시간을 부러 스스로 중단하는 느낌도 들었다.


작은 유리 주전자에 물을 붓고 이번엔 30초보다 조금 더 기다렸다. 씁쓸한 맛이 나겠지만 그만큼 차 향이 입 안에 오래 남으니까. 이제는 속옷처럼 내 몸의 필수품이 되어버린 마스크를 쓰고 밖으로 나섰다. 숨을 쉴 때마다 마스크 안에선 매화꽃 향이 돌았다. 마당에 피었다는 매화꽃은 단 네 송이뿐이어서 인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잔잔한 시간 속에 푹 빠져있던 오늘이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는 오늘, 무해한 하루가 지났다. 라고 생각했다. 오후 6시, 퇴근 시간에 경복궁과 시청을 거쳐 서울역으로 향하는 만원 마을버스를 타기 전까진 ···.




|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4일 차 _ 아무 일도 없는 오늘



 

북촌한옥청을 등 지고 서면 보이는 북촌 3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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