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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영 Mar 03. 2021

서울행 무궁화호 2호차 41번

기차에선 하루의 냄새가 난다

평일 어느 날의 오전 여덟 시 오분.

나는 서울행 무궁화호 2호차 41번에 앉아있다.

 

기차의 머리에 붙어있는 1호차는 구조상 환기가 잘 되지 않는지 간혹 오래된 화장실 냄새가 나고, 5~8호차는 대합실로 올라가는 계단과 꽤 멀다. 문과 가까운 좌석은 기차가 역에 멈출 때마다 내리고 타는 사람들로 번잡하니 적당한 중간 자리가 좋다. 기차가 용산역을 지나면 곧바로 한강을 가로지른다. 한강을 지날 때 기차의 우측으론 1호선이 지나고, 좌측으론 한강이 바로 펼쳐진다.


그래서 2호차 좌측 열의 창가 41번 자리가 딱이다. 6개월간 아침, 밤으로 매일 두 번씩 기차를 타며 체득한 ‘내게 딱 좋은 자리’.




아침 기차에선 별다른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대신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자리를 찾는 사람들의 소리가 모여 객실을 채운다. 지금 2호차 안엔 행선지는 모두 같지만 제각각 다른 목적과 모습을 지닌 채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캐주얼 재킷의 소매를 살짝 걷은 이의 손엔 모서리가 둥근 남색 노트북 가방이, 코랄빛 파카를 입은 이의 주름진 손엔 무엇이 들었는지 모를 짐 한 무더기가, 머리카락이 아직 마르지 않은 누군가의 손엔 손거울과 파운데이션, 아이브로우, 립스틱 등이 요란하게 들려있다.


모두 자리를 찾아 앉거나 어딘가에 기댈 곳을 찾을 때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객실 내가 덜컹덜컹 흔들린다. 구김 하나 없이 반듯한 유니폼을 입은 열차 승무원은 한 손에 PDA 기기를 든 채 좁은 복도에서 흔들림 없이 곧은 자세로 걷는다. 한편 그의 눈자위는 빠르게 움직인다. 그가 지날 땐 계절 뭍은 바람 냄새가 난다.


승무원의 옷깃에 묻은 냄새를 제외하곤, 열차 안에선 대부분 비슷한 냄새가 난다. 인파 속에서 손 디딜 틈을 찾는 입석 승객의 손목에서 나는 향수 냄새, 누군가의 숨에서 나는 가글 냄새,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나는 샴푸 냄새, 아직 피부에 스며들지 못한 진한 파운데이션 냄새 등이 객실 안에서 떠다닌다. 이렇게 하루의 시작에서 나는 냄새를 향수로 만든다면, 아마 베이스는 시트러스, 미들은 샤워 후 습기가 가득 찬 화장실 냄새, 탑은 본인에게서 나는 냄새(아침에 먹은 음식, 향수, 샴푸, 담배 냄새 등) 일 거다.




어느 금요일의 밤 열 시 오십 분.

나는 다시 부산행 무궁화호에 앉아있다.

 

서울역에선 구깃구깃한 장바구니에 옷가지를 대충 넣어 들고 엄마 밥을 먹으러 본가로 내려가는 길인 듯 보이는 자취생, 시든 파처럼 힘아리 하나 없는 몸이지만 표정은 미묘하게 밝은 야근한 직장인이, 영등포역에선 주로 회식을 마치고 달큰하게 취한 직장인,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청년이 기차 위로 올라탄다. 또 한 번 덜커덩하고 문이 닫히면 기차 안의 청년은 승강장에 서 있는 연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같은 기차, 같은 호차 안이지만 아침과는 분명 다른 냄새가 난다. 누군가의 겉옷에 밴 어묵탕 냄새와 알코올 냄새, 또 누군가의 머리카락에 밴 삼겹살 냄새와 담배 냄새, 내게서 나는 하루에 찌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냄새가 섞여 코를 찌른다. 뿐만 아니다. 하루의 마지막 열차엔 이미 하루 동안 열차에 머물다 간 사람들의 각기 다른 일상의 냄새가 차곡차곡 쌓였을 거다.


하루의 끝에서 나는 냄새를 향수로 만든다면, 음.. 아무도 사지 않을 테지만, 분명 무척 묵직한 향이 날 것 같다고 어느 퇴근길에 생각했다.




|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3일 차 _ 서울행 무궁화호 2호차 4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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