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골목에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들
볕이 좋은 날, 걷고 싶어질 때면 행궁동으로 간다. 크고 작은 골목이 옹기종기 모인 동네다. 이미 모든 골목을 안다고 자부해왔는데, 오늘은 처음 본 골목이 있었다. 그 골목 끝으론 성곽의 일부인 어느 문이 보였다. 카메라를 들어 골목의 풍경을 뷰파인더로 바라봤다. 프레임 안에서 어떤 몸짓이 보였다. 동친(동네 친구)와 수다를 떨던 한 할아버지였다. 그는 내게로 몸을 돌려 손바닥을 얼굴 양옆으로 활짝 펼쳐 웃으며 “까꿍~”이라 말했다. 별안간 갓난아기가 된 느낌이었다.
수다가 끝났는지 그의 동친이 집으로 들어가 버리고, 까꿍 할아버지는 내게로 걸어왔다. 걸음걸이에서도 그의 유쾌하고 호기심 많은 성격이 보였다. 그에게 물었다. 저 문은 이름이 무엇이냐고. 화서문이라 했다. 길치에 방향치인 나는 맨날 보던 문도 낯선 골목에서 봤다고 해서, 내가 알던 그곳인지 조차 몰랐던 거다. “아하~ 그래요?” 나는 골목 풍경과 화서문 뒷모습이 함께 보이는 구도로 사진을 몇 번 더 찍었다. 한 발자국 옆에서 날 구경하던 그는 “어떻게 나왔나~ 허 사진기가 좋구먼. 잘 나왔어~~”라고 말하곤 나와 짧게 웃음을 주고받은 후에 나를 스쳐 내 뒤로 걸어갔다. 웃고 있는 그의 눈가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와 수다를 떨던 할아버지의 집은 다섯 걸음 앞에 있었다. 2층 베란다 빨랫줄에 집게로 양말을 콕 집어 널어놓은 모습, 대문과 우편함 색깔을 오렌지 빛으로 맞춰 칠한 모습, 본인에겐 쓰임이 다한 그릇이 필요할 누군가를 위해 가지런히 정리해서 문 앞에 놓아둔 모습이 참 예뻤다. 집주인의 깨끗하고 따뜻한 마음이 집에 배었는지 굳게 닫힌 대문에서도 온기가 느껴졌다.
그런 것을 관찰하며 사진을 찍다가 어느 재미난 소리가 귀에 콕 박혔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돌아보니 작고 하얀 개가 앙칼지게 짖고 있었다.
“왜 이렇게 짖어 싸는겨~~ 나한테만 그러는디? 그만 짖어 이 눔아!”
“어마마, 얘 여자예요~~”
50대로 보이는, 빨간 바지를 입은 어떤 어머님이 개의 리드 줄을 잡고 서서 말했다.
“허허, 그려? 그만 짖어라 이 년아!”
? 저 대화는 뭐지? 뒤늦게 웃음이 터진 내 눈에 들어온 건 까꿍 할아버지였다. 욕이 섞인 말소리에서도 정이 느껴졌다. 까꿍 할아버지와 수다를 떨던 빨간 바지 어머님은 바쁜 일이 있다 말하더니 금방 어딘가로 사라졌다. 의자에 가만히 앉은 까꿍 할아버지의 눈이 바빠졌다. 자신과 수다를 떨 피사체를 찾는 듯했다. 나는 그런 그를 뷰파인더로 바라보았다. 셔터를 누르진 않았다. 그 골목에 가면 언제든 그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까꿍 할아버지에게서 멀어져 다시 골목골목을 다니며, 어느 집 앞에 나와있는 의자, 화분, 골목길 구석의 나무에 달린 매화꽃 같은 것들을 찍었다. 그럴 때마다 집주인 혹은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어르신들은 어딘가에서 나타나 나를 관찰했다.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차분히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내게 말을 걸었다. 낯선 이가 자신의 생활이 묻은 공간을 사찰하고 있으면 으레 도끼눈을 하고 경계할 법 하지만, 되려 그들의 눈엔 순수한 궁금증이 담긴 듯했다. ‘허허, 저 이 눈엔 저것이 이쁸가?’하고.
그런 그들에게 “의자가 너무 예뻐서요~ 꽃이 너무 예뻐요~ 찍어가도 될까요?” 하고 물으면, 아무렴 좋다는 대답과 함께 그들의 얼굴엔 웃음이 피어났다. 그들은 자신이 일군 무언가를 누군가 알아봐 주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낯선 이에게도 관대할 수 있는 그 마음이 참 예쁘다 생각했다. 그런 마음이 그들의 공간에도 묻었는지,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의자, 화분에서도 말로 설명하지 못할 어떤 생기와 온기가 느껴졌다.
존재 자체만으로 골목에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들, 행궁동 골목의 어르신들이 오래오래 사시면 좋겠다. 이 무해하고 정겨운 분위기가 언제까지나 지속되길 바란다.
|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28일 차 _ 행궁동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