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예보에서 눈이 올 예정이라고 알려는 줬지만 올 겨울 처음 내리는 함박눈을 막상 눈으로 직접 보니 왠지 가슴이 설렌다. 눈 내리는 겨울날의 낭만 따위는 잊은지 오래지만 그래도 오늘은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은 기분 탓인가?
띵동!
평소에 울리지 않던 페이스북 메신저가 경쾌한 소리로 알림을 전해준다.
"나 기억해?"
수줍게 나의 기억력을 확인하는 그녀의 이름이 낯익다. 내가 치매에 걸리지 않은 이상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나의 초등학교 동창이자 가슴 시린 짝사랑(?).
반가움보다도 고마움이 앞선다. 17년 전 각자의 결혼으로 헤어진 이후로는 전화도, 문자도, 각종 SNS도 닿지 않던 그녀가 나를 먼저 찾아주니 가슴과 함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내가 너를 어떻게 잊어?"
담담한 척 답을 하면서도 나는 이미 마음속의 환호를 외치며, 이 나이쯤 되면 깨닫게 되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되뇌인다. 잊지 않으면 언젠가는 만난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혜성이 궤도를 잊지 않고 태양을 공전하듯이, 아무리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 대관람차는 반드시 땅으로 내려오듯이, 우리는 그렇게 다시 만났다.
얼마 전부터 '작가라서 쓰는게 아니라 쓰니까 작가'라는 생각으로 어줍지않게 끄적인 일상과 생각을 SNS에 공유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읽기를 바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습작 수준의 끄적거림인데, 마침 지역 도서관에서 글쓰기 강좌를 수강하며 에세이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갖던 친구에게는 한번쯤 읽어볼만한 글이었던 모양이다.
"글을 쓰는 건 작가가 쓰지만, 글을 완성하는 건 독자다. 어떤 글을 내지르던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글이 갖는 존재의 의미는 달라진다. 억지로 예쁜 글을 쓰지 말고 내 글을 예쁘게 읽어줄 독자에게 감사하며 있는 그대로를 써내려가자"
내가 써놓고도 멋지다고 생각했던 다짐의 문장이 그녀의 글쓰기 도전에 어떤 감화를 줬을지도 모르겠다. 십수년만의 가슴 설레는 재회임에도 친구는 대뜸 자신의 습작을 내놓으며 평가를 해달란다. 원고 속에는 그녀의 추억이 가득 담겨 있었고, 나도 그 추억을 따라 아련하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글쓰기는 힘이 세다.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는 힘도 있고,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치유의 효과도 있다. 무엇보다 SNS에 올려놓은 잡문 한 편이 오래 전 친구를 소환해줬으니 다른 어떤 보람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힘이다.
말과 글을 다루는 직업을 오래 했으니 내 이름으로 책 한 권 갖는 꿈을 가져볼만도 하지만 게으른 천성 탓에 이렇다 할 저작이 없는 나로서는 함께 글쓰기를 공부하자는 친구의 제안이 반갑기만 하다. 내년에는 책을 한 권 내고 싶다는 그녀의 소원을 외면할 용기가 내게는 없다.
내친 김에 글을 쓰는 모임을 하나 구성해서 운영해볼까 한다. 쉽고 간결하면서도 밀도있는 글을 쓰는 나만의 몇 가지 노하우를 공유하는 모임을 통해 직업 작가가 되겠다는 나의 소박하고도 원대한 꿈도 함께 이뤄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불과 며칠전에 라이터스 블록에 갇혀 하얀 메모장을 멍하게 바라보던 나로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고 그 변화의 시작이 글쓰기가 찾아준 친구라고 한다면 너무 드라마틱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