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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공의 일기

by 동 욱

알록달록한 풍광을 배경으로 펼쳐진 푸른 잔디밭. 여기는 동쪽에 있는 한 골프장, 500미터 파5 홀이다.


윤 프로가 먼저 간단히 몸을 풀고 티샷을 날렸다. 방향 자체가 틀려먹은 공은 오른쪽 OB 구역으로 날아가 보이지도 않는다. 2벌타 확정! 최소한 더블보기인데다 저런 스윙이면 더블파 중도 포기도 가능하다. 아무래도 김 캐디가 옆에서 이런저런 조언이라고 한 게 오히려 역효과가 난 것 같다. 이번 홀 승부는 보나마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이 프로의 티샷은 반대편 헤저드를 향해 날아간다. 동반자의 실수에 흥분했는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큰 소리로 힘내라고 외치는 갤러리의 응원 때문이다. 티샷할 때 만큼은 집중할 수 있도록 조용히 해줘야 하는데 이 갤러리들은 매너가 없다. 이번 홀 승부도 알 수 없게 됐다.


윤 프로의 문제는 비거리가 아니라 방향이다. 자신이 공을 어디로 치는지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휘둘러댄다. 오랜 세월, 프로 데뷔부터 함께 지낸 김 캐디가 시키는대로만 치는데도, 어제 마신 술이 덜 깨서 스윙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데나 보고 아무렇게나 치는거다. 잃어버린 공만 해도 30개가 넘는다. 할 수 있는 건 남 핑계 밖에 없다. 이전 선수가 잔디를 망쳤다고 투덜대거나 아니면 동반자에 대한 구찌 뿐.


이 프로는 지나친 자신감이 문제다. 전국의 어렵다는 골프장은 다 섭렵하고 온데다 트러블 샷 하나만큼은 일품이다. 위기 때 마다 갤러리들이 도와준다. 불리한 규칙을 바꾸라고 골프장에 전화하고 심지어 공이 벙커에 빠지면 그 벙커에 잔디를 심어줄 정도다. 이번 대회에는 갤러리를 모두 자신의 친구들로만 구성했다. 경쟁자가 등장하려고 하면 '죽인다'고 협박해서 경기를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남들이 안 볼때 알까기를 한다는 소문은 있지만 확인은 안됐다.


두 사람이 OB티에 나란히 섰다. 윤 프로는 2벌타, 이 프로는 1벌타를 받았다. 윤 프로는 이 프로가 반칙을 했다고 협회에 신고를 했다. 윤 프로는 예전 협회장이었다. 이 프로의 갤러리들은 윤 프로의 수준낮은 경기를 못보겠다며 중도 포기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 페어웨이는 선수와 갤러리와 협회 직원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이다.


홀컵까지는 250미터가 남았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중간에는 미국산 모래로 가득찬 벙커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고, 그 옆에는 중국산 잔디가 길게 자란 러프 지역이다. 이것들을 뚫고 지나가야 고운 잔디가 깔린 그린이 나오는데 저 두 선수들은 아직도 저렇게 싸우고 있다. 오늘은 이렇게 해를 넘기려나 보다.

나는 골프공이다. 내 팔자가 이렇다. 좋은 선수를 만나면 기분좋게 하늘을 날아 잔디 위를 또르르 구른 뒤 홀컵에 쏙 들어가기도 하지만, 엉터리 선수를 만나면 물에 빠지다 모래밭에 처박히다 먼 산으로 날아가버리기도 한다. 오늘처럼 경기는 안하고 치고박고 싸우기만 하면 하루종일 제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이 경기의 끝은 어떻게 될까? 다시 평화롭게 경기를 계속할 수 있을지, 아니면 끝없는 싸움으로 결국 골프장이 망하게 될지. 그것을 결정하는 일은 누구에게 달려 있는지 지켜봐야겠다.



골프는 단순히 공을 쳐서 홀에 넣는 스포츠 이상으로 규칙과 윤리, 태도를 중시하는 철학적 스포츠다. 골프가 가진 몇 가지 특성은 정치와 사회 전반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특히 지금같은 정치의 혼란 속에 골프의 본질이 일깨워 주는 교훈은 생각해볼만 하다.


1. 경쟁자를 '동반자'라고 부른다

골프에서는 함께 경기를 치르는 사람을 '상대 선수'라고 하지 않는다. '동반자'라고 부른다. 골프가 개인의 기록 경기이면서도 함께 경기장을 누비며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 스포츠라는 점이 다른 스포츠와의 가장 큰 차이다. 정치에서도 이 원칙은 유효하다. 서로 다른 정당과 이념이 대립하더라도, 결국 하나의 국가라는 공통된 경기장을 공유하는 동반자들이다. 이념과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하기보다는, 동반자로서 협력과 존중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2. 자율과 책임의 스포츠

골프는 심판이 없는 스포츠다. 모든 플레이어는 스스로 규칙을 지키며, 규칙을 어겼을 때 자발적으로 벌타를 선언해야 한다. 이는 정치인들이 가져야 할 자율성과 책임의식을 잘 보여준다. 정치는 공익을 위해 자율적으로 규범을 지키고,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스스로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 골프처럼 규칙을 어기고도 들키지 않기를 바라는 태도는 결국 경기 전체의 신뢰를 무너뜨릴 뿐이다.


3. 규칙은 모두에게 평등하다

골프는 누구에게나 같은 규칙이 적용된다. 프로든 아마추어든, 공이 어디에 놓여 있더라도 규정된 방식대로 쳐야 한다. 사회의 법과 규범은 권력의 크기나 개인의 지위에 따라 달라지지 않아야 한다. 권력이 크다고 해서 규정을 바꾸거나, 책임을 면제받는다면 그 사회의 신뢰는 금세 무너질 것이다.


4. 자신과의 싸움

골프는 기본적으로 자신과의 싸움이다. 상대방의 스코어에 영향을 줄 수 없고, 자신의 샷만으로 경기를 풀어가야 한다. 정치에서도 비슷하다. 상대를 비방하거나 약점을 노리는 데 집중하기보다, 자신이 세운 정책과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실력을 키우고 약점을 보완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국민의 신뢰를 얻는 길이다.


5. 신중함과 균형의 미덕

골프에서는 한 번의 스윙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 공을 제대로 치면 페어웨이에서 안정된 자세로 다음 샷을 이어갈 수 있지만, 잘못 치면 방향이 틀어지고, 작은 실수 때문에 큰 페널티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골프는 매 샷마다 신중해야 한다. 정치에서는 어떤가? 결정적인 순간의 판단이 정치인 자신과 국가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신중함과 책임감을 가지고 균형을 유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골프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경쟁자를 동반자로 바라보고, 규칙과 윤리를 자율적으로 지키며, 신중하게 판단하는 골프의 철학은 사실 정치 뿐 아니라 모든 사회생활, 인간관계에 접목해 볼 수 있다. 골프가 그렇듯 인간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에 완벽이 있을까? 정치도 마찬가지다. 그저 정직하게 헤드업 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이 해야할 일을 골프치듯 해나가면 더 공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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