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부터 시작해 10년 동안은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다. 그 후 10여 년은 홍보 공무원으로 지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결론을 먼저 내세우는, 이른바 '두괄식' 글쓰기에 익숙해졌다. 사실 대부분의 글쓰기 지침서에서도 논리적이고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두괄식 글쓰기를 권장한다. 처음부터 명확한 결론을 제시하고, 뒤따르는 설명으로 그 근거를 구축하는 방식이다.
이런 스타일의 글쓰기는 독자가 처음부터 핵심을 이해하고 읽을 수 있게 해 준다. 사람들은 보통 글쓰기의 시작에서 의미없는 서론을 길게 늘어놓으면서 핵심 내용으로 가는 길을 잃는다. 그래서 독자 입장에서는 글에 대한 흥미를 쉽게 잃고 끝까지 읽기 어려워지기도 한다. 글이란, 첫 문장에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고 결론을 앞세워 구조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게 내가 책에서 본, 그리고 실제로 경험해 왔던 글쓰기의 지침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반드시 '미괄식'으로 써야 하는 글도 있다. 어떤 칼럼에서 인용한 강연 중 한 대목은 이렇다. "어떤 경우에는 미괄식이 더 효과적입니다.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충분히 근거를 검토하고 이해한 다음에 결론을 제시해야 하는 글이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두 회사가 합병을 논의하는 보고서는 미괄식으로 작성하는 편이 좋습니다. 왜 합병이 필요한지, 어떤 방식이 가장 적절한지 충분히 설명하고 나서 결론을 제시해야죠. 그렇지 않고 처음부터 '이 방식으로 합병한다'고 결론을 말해 버리면, 그 이후의 모든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양쪽 모두 반발할 가능성이 크고, 특히나 복잡하고 민감한 상황에서는 설득력이 부족해지기 마련이죠."
이 말은 단순히 글쓰기의 기술을 넘어, 세상의 많은 일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을 바꿔놓았다. 나는 아주 오래 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거리에서 시위를 하기도 했고, 지인들과의 대화에서도 ‘FTA는 나쁜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때 왜 그렇게까지 반대했던 것일까? 지금 생각해 보면 더 많은 정보를 보지 않아 다양한 가능성을 배척하며 옳다고 생각하는 결론을 서둘러 내렸었다. 나는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정부 부처에서 자유무역협정의 대국민 홍보를 담당하는 공무원으로 채용됐다. 국가 간 자유무역이 우리나라 무역과 경제, 그리고 국민들의 실생활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를 발굴해 대중 매체를 활요한 홍보를 하는 일이 내 업무였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회적 이슈에서뿐만이 아니다. 직장, 가정, 친구 관계에서도 결론부터 내뱉고 대화를 망쳐버린 경우가 적지 않았다.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나의 결론을 내리게 되면 상대는 대화의 의지가 없어져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된다. 양쪽 모두에게 유리한 일이, 최종 결론을 앞서 말해서 무산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장기적으로 진행할 일이나 적대 관계에 있는 양측을 설득해야 할 때, 혹은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때, 이럴 때는 적절한 미괄식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하지만 효율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미괄식의 가치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인터넷 뉴스를 보면 온통 자극적인 제목으로 가득하다. 결론만을 도드라지게 뽑아낸 제목들. 그 제목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기사 전체를 읽고 충분히 이해하기도 전에, 이미 자기만의 입장을 정하도록 만들었다. 세상이 점점 빠르고 효율적인 결정을 요구하면서, 미괄식의 여유는 설 자리를 잃고 있었다. 충분히 고민하고 생각할 시간을 빼앗기면서 놓치는 것은 결국 여유와 가능성이다.
사람들에게 "인생이 두괄식이냐 미괄식이냐?"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미괄식을 선택할 것이다. 행복과 불행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그런 인생은 두렵다. 부모의 직업과 경제력으로 자신의 삶이 결정되는 것은 불공평하다. 지금까지의 경험이 내 인생의 전부라면,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것이다. 마지막 순간 잘 죽는 것이 가장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을 미괄식으로 바라보고 싶어한다.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아직 열리지 않은 수많은 문들이 있고, 우리는 그 문을 하나하나 두드려 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는 점점 더 '결론부터 말하라'는 요구를 받으며 살아간다. '그래서 네 입장이 뭐냐?'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 질문이 나온 시점에서 더 나은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결론을 먼저 요구받으면, 그 과정에서의 여유나 미묘한 차이는 사라져버린다. 논쟁은 더 날카로워지고, 대화는 더 얕아진다. 오히려 미괄식으로 접근해야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는 일들도 점점 더 간소화되고, 단순화되고, 결론으로만 압축되어 버린다.
나는 인생을 두괄식으로 살아온 적도 있었고, 미괄식으로 살아온 적도 있었다. 젊은 날에는 두괄식이 필요했다. 무엇을 위해 달려야 하는지 알고,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 중요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미괄식의 여유가 필요해졌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앞으로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그 끝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나를 더 깊이 이해하고, 끝을 미리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일, 그것이 미괄식의 인생이 줄 수 있는 여유이자 기쁨이다. 세상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충분히 생각하고, 마침내 도달하는 결론은 훨씬 단단하고 깊이 있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이야기 자체가 미괄식의 연속이다. 아직 펼쳐지지 않은 다음 페이지를 기대하며 오늘을 살아간다.
인생은 아직 미완성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의 삶을 살아가며, 다음의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다. 인생이 두괄식이 아닌 미괄식으로 남아있기를, 내가 그 안에서 계속해서 걸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이것이 우리가 인생을 대하는 긍정적인 태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