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속 부대의 월남 파병이 결정되자, 삼촌은 크게 두려워합니다. 전쟁의 광기 속에서 전사자가 속출하고, 그에 따른 피의 보복이 비밀처럼 이뤄지던 때였습니다. 후방으로 배치되기 위해서는 뒷돈을 써야 하고, 비상 상황을 대비하여 금반지도 두 개 쯤 가져가야 한다며 삼촌은 휴가 내내 울었다 합니다. 늙고 마음 약한 부모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샘터 옆 이백 평의 논을 팔아 돈을 마련하고 첫째 아들과 며느리의 결혼반지를 녹여 삼촌의 손가락에 끼워줍니다.
가난은 그때 시작되었다고 어머니는 기억합니다. 시집에 와서 몇 년 동안 숨도 아끼며 일해 벌었던 돈. 그것으로 겨우 마련한 논이 사라지자 점차 생계와 살림이 어려워진 것입니다. 미래를 향해 뜀틀처럼 딛고 나아가려 했던 희망의 몇 백 평. 그 논은 아버지와 어머니께 그런 의미였습니다. 그것이 월남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녹아 사라진 것. 결혼반지까지 녹여서 시동생에게 줬어야 했으니, 마음의 가난도 그때 자라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가난할수록 추위는 삶의 주인이 되어서, 얇은 문풍지 안쪽으로 내외가 추워 안고 잠들 때, 자리끼로 떠다 둔 물은 방안에서 꽁꽁 얼고, 가난에 참견하듯 지나가는 바람은 밤 새 웅웅 크게 소리를 냈다고 합니다. 쌀독은 비고, 손은 트고, 먹어야 하는 입은 많으나 수입은 점점 줄어, 얼굴이 빈 그릇처럼 창백했던 가족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 독한 겨울이 오기 전 봄, 태기를 느낀 어머니는 가난하여 결국 중절을 결심합니다. 쌀과 분식을 덜 먹고 보리밥을 많이 먹어야 겨우 가난을 면할 수 있다고 흑백 티비로 선전하던 때였고,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강력한 저 출산 정책 후에, 급기야 임신 안 하는 해를 지정하여 반상회와 포스터로 홍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남의 집 일을 나가 모아두신 얼마의 돈을 들고 읍내 산부인과로 향하셨는데,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고, 고무신 신은 발로 툭툭 차보는 봄의 땅은 젖어 있어서, 얻어온 씨앗들을 이제 곧 뿌려도 되겠구나 그렇게만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버스가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릴 때 곧 안녕할 아기지만 혹시 다칠까 너무도 걱정되어 손잡이를 꼭 잡으셨고, 읍내 병원에선 수술은 요 근래 하여야하고 지금 가져오신 돈보다 이천 원이 더 필요하다는 답을 듣게 됩니다.
가난이 주인이던 그때, 가난이 명령이던 그때, 이천 원은 큰돈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돈을 구하기 위해 친정집으로 가셨다가 당시 중학생이던 막내 동생에게 들어가는 돈이 커서 걱정이라는 집안 사정만 듣고, 마당을 몇 번 서성인 뒤, 고추 파종할 때 부르셔요. 바쁘지 않으면 제가 도울게요, 겨우 그 정도 말만 남기고 돌아오셨을 뿐입니다.
그 무렵 월남에서 제대하여, 월남이 그저 자랑이던 시동생, 그러니까 나의 삼촌에게, 혹시 그 반지를 쓰지 않았으면 돌려줄 수 있느냐, 지금 꼭 필요하다 말했을 때, 삼촌은 겨우 기억났다는 듯, 고마웠던 어느 베트남 사람에게 주고 없다고, 쉽게 대답합니다. 어머니는 그저 알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울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식구들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그 뒤로 이웃집에서 얻어온 씨앗을 파종하고, 그 씨앗이 자라고 수확되는 과정을 농사일로 버티다 점차 무거워지는 몸으로 겨울에 닿은 뒤, 어머니는 방안을 거친 숨으로 스스로 덥히고는 한줌 크기 작은 아이를 낳게 됩니다. 태어난 아이는 울지 않아, 엉덩이를 툭툭 때려도 울지 않아, 처음엔 죽은 거로군 생각하셨고, 산모가 풍족히 먹지 않아서 그렇다, 그 생각으로 마음이 고통으로 쥐어질 때, 비로소 인사하듯 크게 울음을 터뜨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지나간 시절의 기억들이 조금 부드러워졌을 때, 어머니는 가끔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너는 이천 원 때문에, 월남전과 막내이모 때문에 태어난 것이라고. 이천 원. 어린 시절 탱자나무 꽃핀 집 앞 골목길을 천천히 걸으며 마음속으로 '이천 원' 하고 중얼거리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잔돈으로 지폐를 거슬러 받으면 생각합니다. 어른이 된 내 손 안의 이천 원. 그것과 바뀌어 온 우연, 또는 운명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천 원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되돌아보면, 가난하여 돈이 부족했던 것이, 가난했다는 것이 생을 다해 고마웠다는 어머니의 고백이 있습니다. 그 시절, 그 돈이 없었다는 것이 고마워, 훗날 많이 우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가난 때문에 네가 태어나게 된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은, 내게, 가난을 핑계로 너를 낳을 수 있었다는 말과 동의어로 들려옵니다.
몇 십 년 후 술에 취한 삼촌이 찾아와 부모가 남겨둔 그 논에 대한 권리를 달라 소리치며 집안의 창문을 다 깨는 행패를 부렸을 때, 그래도 네가 태어나 잘 자랐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다 그렇게만 말씀하셨습니다. 고등학생이 된 친정집 동생이 이리역 폭파사건으로 허망하게 죽었던 기억을 떠올릴 때에만, 가끔 우셨습니다. 그러니까 너는 두 배로 열심히 살아갈 필요가 있다, 그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베트남으로 가져갔던 어머니의 결혼반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느 술집에서 녹아 그곳의 귀한 살림이 되었을까. 그 집안의 생계에 보탬이 되었을까. 베트남에 여행 갈 때마다 생각합니다. 연금술처럼, 그 반지가 어떤 미소와 행복이 되었기를. 그곳에서도 어느 출산에 도움이 되었기를. 나는 늘 생각합니다. 이천 원의 크기로 생각합니다.
(월간 해피투데이. 201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