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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lon easy Dec 27. 2022

아프리카의 따뜻한 심장

Lilongwe_Malawi_2011

2022년... 올 한 해, 무척 많은 일을 도모했고 그만큼 성과도 있었지만 많은 복닥거림과 주기적인 번아웃이 남았다.  끊임없는 설명과 반발과 설득... 그런 게 반복되다 보면 이게 정말 대의를 위한 건지 나를 위한 건지 가늠이 안되기 시작한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을 되뇌어 보지만 약하디 약한 내 자존감은 금방 무릎을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그래서 나를 다시 잘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편안한 시간을 보내자는 결심을 하면서, 예전의 나를 돌아볼 여유가 없어서 한동안 절필했던 브런치 글을 다시 시작해 본다. 나를 찬찬히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라위


2011년 가을, 계속되는 '특별기획 미션' 촬영을 위해 남부 아프리카의 최빈국이자 우리나라 영토의 반 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 말라위로 향했다. 말라위 촬영 후 이태석 신부님이 살았던 남수단 톤즈로 넘어가서 일정을 이어가는 3주간의 여정이었다.

말라위의 수도 릴롱궤 공항에 내려 흙먼지 날리는 활주로 위를 캐리어와 장비가방을 이고 지고 끌고 이민국으로 향했다. 시골 버스 대합실 같은 곳이었고 입국 심사를 받기 위해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고단함과 뭔가 일이 효율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답답함이 새로운 촬영지에 대한 막연함 때문에 생기곤 하는 걱정과 함께 복합적인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자신들은 급할 것이 없다는 듯,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동양에서 온 여행객에게 자신들의 자리를 내어주고 기분 좋은 관심을 보내주는 이곳 사람들 덕에, 이내 내 부정적인 감정들이 부끄러워졌고 마음은 몽글몽글해져 갔다. 낯선 곳에서 조우하는 불안함은 항상 그곳 사람들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 같다. 그리고 환대의 느낌은 모든 우려와 복닥임을 일순간 사라지게 한다.

흔히 말라위는 '아프리카의 따뜻한 심장'이라고 불린다.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말라위 호수가 인근 지역의 생명줄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앞뒤 재지 않고 이방인을 환대하며 배려하는 전통과 문화 때문인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릴롱궤 외곽 마을 풍경

돈보스코 센터


돈보스코센터와 기술학교 그리고 초중등학교는 릴롱궤에서 제법 규모가 크고 시설이 좋은 교육기관이다. 만 명에 가까운 청소년들이 다양한 교육과정에서 미래를 준비해 가고 있었다. 센터는 청소년들이 아무 때나 와서 춤, 노래, 문예, 운동 등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고, 기술학교는 전기, 자동차 정비, 목공, 네일아트, 컴퓨터, 호텔경영 등의 실무교육을 하는 곳이다. 초중등학교인 '사방고'는 기초 정규교육을 하는 곳으로 8,000여 명이 다니고 있어 인근 지역의 아이들은 다 이곳에 모여 있는 느낌이었다.  한국인 신부님과 현지 신부님들을 중심으로 현지 교사, 직원, 봉사자들, 한국 교민들의 도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말라위 돈보스코 센터
돈보스코 기술학교
오스트리아 봉사자 사라와 카리나(左), 한인 봉사자(右)
릴롱궤 한인 공동체 미사

사랑과 정의

그 둘 사이에서 고민하는 많은 분들을 만난다.

그를 통해 내 앞에 놓인 수많은 판단의 순간이 그 두 지향이 충돌하는 지점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사랑"이라는 확실한 답이 있음에도 정의를 앞세우는 많은 선택들...

'정의'가 더 가깝고 쉽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이분들을 이렇게 깊이, 많이 만나지 않았더라면 크게 고민하지 않았을 문제!

'사랑'... 참 어렵다.

[2011. 9. 7. 페이스북]


릴롱궤 돈보스코센터에 도착해서 신부님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역별로 상황과 조건이 다를 뿐, 선교사로서의 공통적인 고민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랑과 정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들... 위의 포스팅에 한 후배가 '올바른 정의라면 사랑과 충돌하지 않을 것만 같은데. 정의는 타인을 위한 헌신, 헌신은 사랑해야만 할 수 있는...'이란 질문 했고 나는 이런 답글을 달았었다. 당시 이 주제에 무척 천착했던 것 같다.


개념으로 보면 그런데...
물론 모든 정의가 사랑과 다르단 소리는 아니고, 우리가 정의란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그리스도적 사랑(원수까지 사랑하라는)의 행위적 차원에서 서로 배타적이 되는 경우가 있다는 거야.
모두 사랑의 정신을 베이스로 하더라도 행위의 차원에서 정의와 사랑이 배치될 때가 있다는 말인데... 유다교가 하느님의 정의를,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것과 같은 차이를 말함이야.
제3세계에서 사랑을 전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겪게 되는 딜레마인데... 내 삶에 적용해보면 많은 경우 비슷한 상황이 있더란 말이지... 더 사랑할 수 있음에도 정의란 이름으로 빨리 해결해 버리려는...


사방고

초중등학교 '사방고'

말라위 릴롱궤의 돈보스코 초중등학교 '사방고'.

넓은 대지에 8,000명의 아이들이 이렇게 땅바닥에 앉아 수업을 받습니다.

교실도 없고 나무 그늘에서 겨우 햇빛을 피하며 공부하는 현장엔 먼지가 심하게 날리고요...

물론 아이들은 언제나 해맑습니다.

마음이 불편해서 카메라 앞에 달려드는 아이들에게 괜히 성질을 냅니다 ㅠㅠ

[2011. 9. 9. 페이스북]


학교를 지을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바로 옆에 넓은 부지는 마련했고 신부님은 계속 한국에 드나들며 모금을 통해 아이들이 뜨거운 햇빛을 피해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고 계셨다.


틈만 나면 촬영 업무 중인 5D Mark2의 동영상 모드를 스틸 모드로 돌려서 아이들의 표정을 담는다. 언제나 잘 지어주는 해맑은 미소와 순박한 포즈 때문이지만 뷰파인더로 마주하는 그 표정과 몸짓에 마음이 연결됨을 느끼며 촉촉해지는 나를 발견한다.

그게 참 좋다. 내가 이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순간의 재미와 기쁨이지만 난 두고두고 사진을 보며 건조한 마음에 보습을 한다.


가수 하림


출장을 떠나기 전, 프로그램의 작가가 어느 자리에서 아프리카 출장 이야기를 했더니 같이 있던 가수 하림 씨가 본인이 어려운 지역의 음악 지망생들을 위해 악기 나눔을 하고 있다며 기타를 전달해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 마음이 너무 소중하고 고마워서 많은 촬영짐들이 있음에도 기타를 소중히 핸드캐리해서 이곳까지 가지고 왔다.

도착 후 취지를 설명하고 적절한 사람을 부탁드렸고 돈보스코 센터에 다니는 라파엘이 그 수혜자가 되었다. 즉석에서 기타를 꺼내 조율을 하고 자작곡을 연주했는데 정말 잘하기도 하고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표정이 아주 좋은 음악가가 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 작은 기부가 라파엘의 꿈을 응원하고 힘이 될 것이라는 확신과 그의 음악이 많은 이들에게 따뜻함을 전할 것이라는 흐뭇함에 괜히 뿌듯해졌다. 그렇게 나는 사랑을 전해준 하림 씨의 팬이 되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이전에 이미 정한 이 프로그램의 타이틀곡이 하림 씨의 작품이기도 하다.

종종 마주하는... 흠칫 놀라서 하늘을 바라보게 하는 묘한 우연 혹은 기적들...

하림 씨가 기증한 기타를 받은 라파엘과 센터장 김대식 신부님

한국 방문 공연단


이곳에서 사목 하는 살레시오회 김대식 신부님은 모금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곳 청소년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며 꿈을 꿀 수 있게 하기 위해 말라위 전통 공연단을 만들어서 한국 방문을 추진 중이었다. 연말로 예정된 한국행을 위해 공연단은 합숙을 하며 열심히 연습 중이었고 신부님은 말라위 전통공연이 상설로 열리는 '무아'라는 지역에 가서 노하우를 전수받는 등 멋진 공연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그리고 그해 11월 한국에서 만난 공연단은 직업 공연단 같은 실력을 뽐내며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해 주었다. 그 경험이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기를...

한국방문 공연단
이동 중에 만난 거대한 바오밥 나무. 천년이 넘었다고 한다.


케냐로, 남수단으로...


말라위에서 열흘 간의 일정을 마치고 이태석 신부님 선종 후의 모습을 담기 위해 남수단 톤즈로 가기 위해 경유지인 케냐 나이로비로 향했다. 걱정은, 그해 7월 수단으로부터 분리독립한 이후 계속되는 내전과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남수단 상황이었다. 말라위를 떠나기 전부터 현지의 사정이 좋지 못하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일단 케냐에 가서 판단하기로 했다.


오늘 말라위를 떠나 케냐로 이동합니다.

'아프리카의 따뜻한 심장'이란 명칭처럼 이곳 말라위는 가난하지만 따뜻한 정과 순수함이 인상적인 곳이었습니다.

어제 이곳 기술학교 학생이 '한국은 단기간에 크게 발전한 나라지요?'라고 물어 오길래 '응 너희도 그렇게 될 수 있어! 공부 열심히 하면...'이라고 답해 주었습니다.

정말 그대로 이루어지길...

[2011. 9. 14. 페이스북]


졸파리(졸지에 사파리)


결국 나이로비에 도착한 후 현지와의 연락을 통해 남수단 입국이 불가능함을 확인하게 되었다. 심각한 정세 때문도 있지만, 새로운 행정 시스템을 갖추는 상황이다 보니 비자가 추가로 필요하게 됐고 케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눈물을 머금고 귀국 후 다시 정비해서 나오기로 했다. 내심 누적된 피로에 좀 쉬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조그맣게 속으로 생각한걸 이렇게 들어주시나 싶어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한 촬영 스케줄의 변동이 가져올 후반작업 일정의 버거움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지난 촬영분들을 정리해서 이제 방송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수단 일정에 문제가 생겨서 일단 이번주 일요일에 귀국하게 됐네요...

마지막이길 바랐는데 담달에 다시 수단으로 나와야 합니다 ㅠㅠ

빨리 들어가서 좋기도, 한 번에 일을 끝내지 못해서 갑갑하기도 하네요.

빨래를 안 해도 되는 것, 담주 야구 경기에 참여할 수 있는 것, 보고픈 여러 사람들을 빨리 볼 수 있는 것 등을 생각하며 즐겁게 들어가렵니다. ㅎㅎ

[2011. 9. 15. 페이스북]



우리를 인솔한 살레시오회 박수사님이 미안했는지 한국행 비행 편을 예약한 후 남는 시간을 이용해서 나이로비 외곽 국립공원에 가자는 제안을 했다. 다들 환호성을 질렀지만... 6년 전 케냐 출장 때 이미 그곳에 다녀와서 다음엔 꼭 제대로 된 사파리인 마사이마라(세렝게티의 케냐 지역)를 가리라 마음먹었던 난 심드렁했다. 동물도 별로 없고 멀리 도시의 건물이 보이는 사파리라니... 그냥 숙소에서 쉬면 좋겠는데... 사파리차 안에서 비포장의 피곤한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싶지 않은데... 삐딱한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몇 시간 후 망원렌즈의 링을 바삐 돌려가며 연신 셔터를 누르는 나를 발견한다. 동물들이 엄청 많다. 그전엔 다 보지 못했던 Big5(코키리, 표범, 사자, 버펄로, 코뿔소)들이 앞에 두둥 두둥 등장했다. 숙소에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렇게 자연 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귀국길에 올랐다.

사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사냥한 먹이를 나눠 먹고 있었다... 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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