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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 Oct 23. 2015

서울의 말

김훈의 산문 <라면을 끓이며>를 읽다가

어머니는 거칠고 사납고 과장된 말을 무척 싫어하셨다.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단정하고 순한 서울말을 어머니는 좋아하셨다. 내가 문밖 아이들과 놀다 돌아오면 어머니는  "너, 걔네들 말버릇 따라 하지 마, 왜가리 짖어대는 것처럼 말하지 마, 반듯하고 조용히 말해라, 조용히 말해야 남이 듣는다"고 타이르셨다. 어머니는 종결어미가 불분명한 말을 싫어하셨고 늘 대하는 이웃집 아낙네들에게도 말꼬리가 분명한 존댓말을 쓰셨다. 어머니는 이제 너무 늙고 또 아파서, 당신의 고운 말씨를 모두 잃어버리셨고 한 되와 두 되를 구분하지 못하시지만, 내 가난한 어머니의 고향은 향토가 아니라 척도와 언어였던 모양이다.

(319쪽. 고향 2 중에서)


한 세대 전까지 서울 사대문 안에서 세거世居했던 토박이 어른들의 서울 사랑은 끔찍했다. 그분들은 북한산과 한강으로 기본구도를 삼는 서울의 웅장한 산하와 그 구석구석의 오밀조밀한 자연풍광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서울의 서울다운 품성과 삶의 질감을 자랑으로 여겼다. 지방 사람들이 '서울 깍쟁이'라고 경원했던 서울의 깐깐한 품성이 그분들의 마음 바탕이었다. 대도회지의 삶이 요구하는 엄격한 계약정신과 경우 바른 시민정신, 그리고 반듯한 준법정신이 그분들의 일상의 생활감정이었다.

서울 토박이 어른들은 일상의 언어에 대해서 민감하고도 섬세하였다. 그분들의 말씨는 언제나 조용조용했다. 과장이나 허황된 비유를 쓰지 않았고, 말투에 경음이나 격음이 섞여 들지 않았다. 그분들은 의견이나 소망을 진술하는 언어와 사실을 진술하는 언어를 구별할 줄 알았고, 자신의 직접체험을 말하는 언어와 남으로부터 전해 들은 말을 뒤섞지 않았다. 편차 없는 의사소통이야말로 도회지적 삶의 기본이라는 것을 그분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분들의 일상언어는 저널리스틱한 언어였다. 같은 서울 안에서도 사대문 안과 밖, 그리고 사대문 안에서도 대궐 언저리의 북촌과 남산 둘레의 남촌 사이에도 거주지에 바탕한 정서적 우월감의 다툼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다툼을 바탕으로 정치사회적인 패거리를 만들지는 않았다.

(327,238쪽. 고향 3 중에서)



서울에서 나서 서른 후반 까지 살았던 나는 이제 쉬흔을 향해 간다. 최근 십여 년을 타향과 타국에서 살았으니 이제 서울 사람이라고 어디 가서 말하기 어렵게 됐다. 실제로 서울 친구들은 이제 나를 지방 사람으로 취급한다. '양평이 어딘지 아느냐'고 묻는 친구도 있으니 말이다. 이젠 나조차 나의 오리지널리티를 명확히 느끼지 못한다. 내가 사는 구미의 언어는 투박하다. 구미에는 안동 포항 경주 상주 청도 예천 등 각지의 경상도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으니 경상도의 언어가 그렇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들의 언어는 모호하며 두루뭉수리하나 공격성을 내포하고 있다. 때론 의뭉하고 경박하며 위압적이다. 물론 경상도 사람 전체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경상도에 사는 사람 중 일부가 그렇다는 거다. 서울이나 다른 지역의 사람 중에도 그러한 경향의 사람이 있겠으나 머리가  굵어진 후 만난 경상도 사람들에게 유달리 그런 느낌을 받는다.

여기서 살아 온 나의 언어는 어떠한가. 종결어미를 분명히 할 줄 알게 됐고, 과장이나 허황된 비유를 쓰지는 않지만, 경음이나 격음을 가끔 쓰며, 사고와 언어의 차이가 임계점을 넘었을 때 인내심을 잃고 흥분한다. 적지 않은 노력으로 내 언어의 장점과 단점을 알게 됐고, 나쁜 언어들을 순화해 가고 있으나 아직은 부족함을 안다. 곧 지천명에 다다를 것이나 하늘의 뜻이나 인생의 의미를  알기는커녕 내 입안의 혀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니 어찌 어른답다 하겠는가.

'내 언어의 한계가 곧 내 세계의 한계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몸과 마음과 말을 다듬고 가꾸는데 천착할 일이다. 이 지역 경상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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