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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 Oct 25. 2015

끝나지 않을 노르웨이의 겨울

에스펜 에릭센 트리오의 재즈 공연을 보고

노르웨이 최북단 도시 트롬쇠에 가서 오로라를 보고 싶었다. 북극해와 가까운 차디찬 바다를 가진 도시. 내가 가진 가장 두터운 옷을 끼어 입고 양말도 두  켤레쯤 겹쳐 신고 중무장을 한 채 생애 겪어보지 못했던 추위와 맞짱 뜨고 싶었다. 제대로 된 오로라 강도 4 이상의 광경을 만나려면 트롬쇠에서 적어도 일 주일 이상은 머무르며 오로라가 찾아와 주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들었다. 기다리는 며칠간 마음에 드는 부둣가 선술집을 정해 놓고 저녁이면 푹신한 의자에 기대 앉아 그 동네 친구들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독주도 몇 잔 들이키고 싶었다. 차가운 북해 바다에서 잡아 올린 육질이 탱탱한 대구를 노르웨이식으로 요리한 안주를 먹고 싶었다.

노르웨이를 가야 할 이유는 오슬로에도 있다. 내가 경애하는 화가 뭉크의 미술관이 그 도시에 있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뭉크전을 보고 나는 그와 그의 그림에 흠뻑  도취돼 버렸다. 뭉크가 다섯 살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죽고 얼마 뒤 누이가 같은 병으로 죽었으며 여동생은 정신병에 걸렸다. 뭉크의 아버지와 남동생 역시 그가 어렸을 때 모두 죽었다. 독학으로 그림을 그린 뭉크도 역시 말년을 신경쇠약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만은 매우 독창적이며 강렬해서 내 감정 깊은 곳의 무언가를 찌르 듯 자극했다.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내가 그와 동병상련을 느꼈다면 과장이겠지만, 내 장애를  진단받기 이전에 이미 난 뭉크에게  매료됐고 그래서 오슬로에 가고 싶었다.


<에스펜 에릭센 트리오>라는 이름의 노르웨이 재즈 뮤지션의 공연을 봤다. 문화예술 공간이라고는 서울의 만 분의 일도 안 되는 도시에 이런 그룹이 찾아와 공연을 한다는 건 행운이다. 공연 전 사회자는 노르웨이 숲을 느껴 볼 수 있을 거라 말했지만 노르웨이  숲은커녕 북유럽에도 가 보지 못한 내가 무슨 수로 그걸 느끼겠는가. 다만 피아노 연주자인 에스펜이 말한 대로 자기는 겨울을 아주 좋아하고 그래서 만들었다는 <네버 엔딩 제뉴어리>라는 곡을 들을 땐 그렇게 느껴보려 했다. 피아노와 더블베이스 그리고 드럼으로 이루어진 이들 트리오의 음악은 끊어질 듯 이어지며  계속될 듯 곡이  마무리됐다. 소설로 치자면 결말을 열어 놓 듯 세 연주자가 서로의 눈빛을 교한 하며 건반 한 개 또는 더블베이스의 현을 한 개 튕기는 걸로 곡을 마무리했다. 노르웨이에서 온 트리오의 들은 세련됐고 연주는 깊고 높고 차분하며 풍부했다. 살을 에는 추위와 기난긴 겨울의 밤들과 침엽수에 싸륵싸륵 쌓인 눈들과 빙하가 녹은 시리고 청명한 바다가 그들의 연주를 완성시켜 주지 않았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눈을 감고 연주를 들으면 소리가 풍성하게  느껴졌는데, 건반을 두드리는 섬세한 손과 현을 누르고 튕기는 노련한 손가락과 드럼을 두드리는 팔뚝이 보고 싶어 이내 눈을 뜨고 봐라 봐야 했다.

<복합문화공간 옴스>라는 공연장은 문화예술의 불모지 구미에서는 보석과 같은 공간이다. 한동안 공연이 없었는데 이 공간을 꾸려 나가는 주인께서 상을 치르느라  중단됐었단다.  오래전에 약속했던 내 보잘 것 없는 캘리그래피 엽서에 감사의 글을 적어 전달했다. 기쁘게 받아 주니 흐뭇하다. 오늘은 같은 장소에서 브라질리언 재즈 밴드의 공연이 있는 날이다. 잠시만 차를 몰고 가면 되는 거리의 공연장에서  북유럽의 음악과 남미의 음악을 하루 걸러 접할 수 있다니 지방 소도시에서 만나는 작지만 큰 즐거움이다.

내게 뭉크와 오로라 외에도 노르웨이에 가야만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그 나라 사람들의 노래와 연주를 그 곳에서 듣고 싶어기 때문이다.

YouTube에서 'Espen Eriksen Trio - Live at Nasjonal jazzscene, Oslo 04.09.15' 보기 - https://youtu.be/QMkU597XB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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