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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 Jul 29. 2019

걷는 사람들

해파랑길의 시작

새벽 두 시. 오른쪽 귀에 대고 무언가 킁킁거리는 기척에 눈을 떴다. 마른 나뭇잎을  밟을 때 나는 바스락 소리가 들린다. 나와 짐승 사이에는 일인용 텐트의 한 겹 천으로 가로막혀 있을 뿐이다. 공원을 떠도는 개나 고양이거나 최악의 경우 가까운 산에서 내려온 멧돼지일지도 모른다. 굶주린 동물이라면 하루 종일 걸어서 땀에 절은 내 몸의 체취가 후각과 식욕을 자극할 가능성도 있다. 무엇이든 저 천막을 뚫고 내 머리나 배를 공격한다면 방어가 마땅치 않다. 텐트 밖의 기척은 얼마간 멀어졌다 다가왔고 다가오다 멀어졌다. 동물이 나보다는 다른 텐트에 관심을 갖기를 소망했다. 엘지 트윈스의 잠실 라이벌인 두산 베어스의 열혈 팬인  A의 텐트를 선택해도 좋겠고, 뽀얀 피부에 살이 적당히 오른 서울에서 온 B의 냄새를 마음에 들어해도 좋겠다. 전투기를 정비하는 현역 공군 신분인 C의 텐트를 선택할 가능성은 왠지 적어 보였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게 동물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눈을 떴다. 메쉬 소재로 마감된 텐트 맨 위 한가운데가 손바닥만 한 삼각형 모양으로 뚫려 있다. 뚫린 삼각형 너머 높이 나뭇잎이 촘촘했고 그 사이로 언뜻 파란 하늘이 보인다. 기차가 덜컹거리며 지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새소리가 하나 둘 들리기 시작했는데 새소리는 점점 커졌다. 새의 종류를 알 수는 없지만 내가 들었던 중 가장 다양한 종의 새소리가 들렸다. 어제저녁 근린공원에 한편에 캠핑용 모기장을 치고 밥과 술을 먹었다. 밤엔 선선해서 모기가 없는 대신 우리가 밥을 먹는 식탁(이라 쓰고 종이 박스라 읽는) 아래로 온갖 종류의 벌레들이 기어 다녔다. 벌레들은 때로 우리들의 얼굴과 밥그릇까지 탐험했다. 역시 내가 보아온 벌레 중 가장 많은 종류를 한 자리에서 보고 있었다. 나는 일정한 면적 내에 새의 수는 벌레의 개체수와 비례한다는 생물학과는 무관한 결론을 내렸다.


아침밥을 먹다가 A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어제 새벽 두 시쯤에 가위에 눌려서 고생했지 뭐야. 꿈에서 웬 짐승이 텐트를 막 흔드는데 30 분을 발버둥 치다가 간신히 깼네."

그렇다. 내가 새벽에 들은 괴이한 기척은 A가 가위에 눌려 발버둥 치는 소리였다. 나는 A 때문에 공연히 공포의 밤을 보낸 거다. 작년에 엘지는 두산에게 1승 15패로 졌고, 나는 어젯밤 A에게 의문의 1패를 당했다. 두산 고 두산 팬도 다.


우리가 울산 시내의 어느 공원에서 무단 취식을 한 건 해파랑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해파랑길은 반도의 최남단 부산에서 시작해 최북단 강원도 고성까지 뻗은 길이다. 해파랑길에는 모두 10 개 구간에 50 개의 코스가 있으며 그 모든 구간의 코스를 더한 길이는 770Km이다. 해파랑길을 부산에서 출발한다면 왼편에는 내륙을 오른편에는 동해바다를 끼고 처음부터 끝까지 걷게 된다. 해파랑길 10 개 구간을 단번에 주파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코스를 나누어 걷는다. 우리도 나누어 걷는 경우인데, 한 달에 한 번씩 두 개 코스를 1박 2일 동안 걷는다. 50 개 코스를 매달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걷는다면 2 년 하고도 한 달을 더 걸어야 하는 장기 프로젝트인 셈이다.

두어 달 전에 트레킹을 시작한 일행들은 1코스부터 4코스까지를 이미 걸었다. 나와 서울에서 온 B는 이번 5~6코스에 합류했다. 5~6코스는 울산의 진하 바닷가에서 출발해서 울산 시내를 'S'자 형태로 관통하여 태화강의 십리대숲까지 연결된 총길이 33.3Km의 길이다.


나의 트레킹 경험은 주로 산에서였으므로 해파랑길과 같은 복합형 트레킹은 처음이다.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부는 진하해변에 모여 인증샷을 남기고 출발했다. 우리 일행은 작은 어선들이 서로를 의지한 채 정박한 강양항을 지난다. 회색 구름이 해수면 가까이 내려앉아 유월의 태양을 적절히 가려주었다. 앞에서 걷는 여고생의 귀밑머리가 해풍에 날린다. 걷기 적당한 날씨다. 길은 해변을 벗어나 작은 강을 거슬러 오르다가 시내를 향한다. 때로는 인도가 따로 없는 다리를 건너거나 좁은 차도를 위태롭게 지난다. 번잡한 시내를 지나면 개와 함께 산책 나온 행인과 마주친다. 붉은색과 푸른색의 해파랑길 안내표지가 길 위에 촘촘히 표시돼 있지만 가끔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한다.


걷노라면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우리는 주로 그저 걷는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싶거나 어지러운 기억을 잊으려 걷는다. 길 위에는 흐르는 강물과 푸르른 숲 그리고 낮은 구름과 촉촉한 바람뿐이다. 5코스는 평지여서 평상화를 신었는데 발이 부르텄다. 멀리 한참 걸을 때는 등산화를 신어야 한다. 이번에 계획한 길의 끝에서 마실 물이 부족해 함께 걷는 이의 신세를 졌다. 다음에는 물을 넉넉히 채워서 떠나야겠다.

그러나 궁금했다. 우리는 왜 걷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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