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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 May 09. 2019

사람과 작품의 바다

2019 홍콩아트바젤에서

전시장 벽에 한쪽 날개가 걸렸다. 관람객들 너머 펼쳐진 날개는 서너 명의 어른들을 품에 안을 만큼의 크기다. 검붉은 깃털들은 가지런히 부풀었고 부푼 날개의 깃털들은 선연히 눈에 들었다. 날개는 남중국해의 고온다습한 비바람을 품었거나 히말라야 랑탕 계곡의 시린 눈보라를 품었거나 야쿠시마 시라타니 숲의 무수한 습기를 품었을 테다. 거대한 날개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섰다. 다가설 때마다 깃털들은 차츰 단단해졌다. 날카롭고 뾰족한 깃털들은 잘 벼려진 낫이며 칼이었다. 칼날이 칼등을 덮고 낫이 낫을 덮어 날개를 이루었다. 칼과 낫의 깃털로 이뤄진 거대한 날개, 그 상상을 넘어선 작품 앞에서 나는 한동안 얼어붙었다.



홍콩아트바젤에 걸린 수천의 작품 중에 나는 왜 유독 저 날개를 오래도록 눈에 담았을까. 매년 한 차례 세계의 각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갤러리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곳. 개막하는 날, 페이스북의 저커버그나 신세계의 정의용 부회장 또는 영화배우 정우성 이정재 등 헤아릴 수 없는 유명인사들이 그림을 쇼핑하러 들린다는 곳. 피카소나 앤디 워홀 그리고 데미안 허스트 등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본 거장들의 작품이 쉽게 눈에 띄는 곳. 한 점 당 많게는 수백억 원에 팔리며 총 거래금액이 조 단위가 넘어선다는 곳. 2019년 봄, 수만의 인파가 모여든 그곳에 나는 서 있다.


그림을 사거나 팔고자 하는 목적이 없으며, 그림을 그리는 작가도 아닌 데다가, 인근의 중국이나 마카오 사람도 아닌 내가, 아트페어를 보고자 홍콩까지 가는 일이 온당한지 모르겠다. 아트페어 개막일을 전후로 두 여인의 생일이 있어 그들에게 홍콩 여행을 선물로 제공함과 동시에 홍콩에 유학 중인 한 남자를 방문한다는 핑계가 겹쳤다. 근현대 예술의 총아가 날을 정해 일제히 이곳에 모인다. 보고 싶은 작가의 그림을 찾아 전 세계의 미술관이나 갤러리 이곳저곳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된다. 3월 말경에 홍콩섬 중심의 컨벤션센터만 찾아가면 해결된다. 가성비 최고의 효율 아니겠는가. 그런 단순한 이유로 몇 해를 별러 홍콩아트바젤을 찾았다.


거래 품목이 예술품일 뿐, 아트페어 역시 사람들 사이에 돈이 오가는 시장이다. 큰 장이 서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법이다. 현장 구매 입장권은 이미 매진이다. 'SOLD OUT'이란 푯말이 입구에 큼지막하게 걸렸다. 예매를 했더라도 입장권을 받기 위해서는 컨벤션센터 외부까지 이어진 기나긴 줄을 서야 한다. 홍콩이 어디나 그렇다지만 전시장 역시 사람들로 넘쳐난다. 사람과 사람을 넘고 넘어 전시장 안으로 들어선다. 이번엔 작품들의 홍수다. 위에 소개한 작품 '날개'처럼 모든 작품을 개별로 보기는 불가능하다. 선택한 작품을 개별로 보거나 전시장 전체를 작품으로 봐야 한다.

회화, 조각, 공예, 비디오아트, 설치미술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전시장에 빼곡하다. 작품들은 벽에 걸리거나 바닥에 깔리거나 허공에 매달리는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감을 나타낸다. 갤러리마다 배치된 딜러들은 따분한 듯 자리를 지키다가도 구매자가 나타나면 눈 반짝이며 작품 설명에 집중한다. 작품들과 딜러와 구매자들 사이로 관객들이 부유한다. 이곳은 작품의 전시장이자 인종의 전시장이다. 다양한 연령과 계층과 국적의 사람들이 뒤섞여 저마다의 작품을 찾는다. 작품에 대한 관심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관객들은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발산한다. 때론 작품보다 관객에게 관심을 빼앗긴다.


작품과 관객 사이에서 문득 길을 잃는다. 퍼뜩 정신을 차려 집중하다가 지치기를 반복한다. 경이로운 작품들을 만끽하며 포만감에 쌓이지만 다시 멀미가 찾아온다. 전시 내내 느꼈던 현기증의 정체가 무엇일까. 지방 소도시에 사는 내가 거대 도시 한가운데서 느끼는 공황. 내 지각 능력을 넘어선 압도적인 작품들이 주는 무게감. 또는 그 둘이 합쳐진 새로운 자극에 의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시장에 나온 작품을 갖고 싶어 졌다. 작품의 소유란 소장자의 안목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재력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내겐 작품을 소장할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미술 작품을 보기 위해 다시 홍콩을 찾는다면 아마도 아트바젤은 아닐 것 같다. (혹시라도 다시 아트바젤을 찾는다면 관람이 아닌 구매 목적이기를 기대해 본다.)  아트바젤이 아니더라도 홍콩섬 곳곳에 산재한 미술관과 갤러리 차분하게 둘러보고 싶다. 이번에 계획했지만 빠듯한 일정과 체력의 한계로 실행하지 못한 홍콩 곳곳의 세계적인 트레킹 코스를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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