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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 Nov 19. 2018

원령공주의 숲에서

야쿠시마의 시라타니운스이쿄 숲을 찾아서 -2

1편에서 계속 https://brunch.co.kr/@mulpure/90 


11월 초 야쿠시마의 날씨는 온화했다. 깊은 산중에서의 추위를 감안해서 두툼한 옷을 몇 벌 준비했지만 기우였다. 등산용 혹은 스포츠용 티셔츠 한 장에 휴식 시간 체온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고어텍스 한 벌이면 충분했다. 바지는 가을용 또는 여름용이라도 무관하다. 우리가 하룻밤을 묵은 신다카츠카 산장에서 출발하는 아침엔 비가 내렸다. 미야노우라다케의 풍광을 담기 좋은 어제는 쾌청했고, 이끼로 덮인 숲의 정취를 느껴야 할 오늘은 때를 맞춘 듯 비가 내린다. 스포츠용 긴팔 이너웨어 위에 우의만 입으니 가뿐했다. 이번 트래킹의 하이라이트인 야쿠스기의 숲 시라타니운스이 계곡으로 향하는 길이다.


빗길을 얼마나 걸었던가. 지구 상에서 가장 유명한 나무 중 하나인 조몬스기를 마주했다. 높이 25.3미터, 둘레 16.4미터 크기로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 살아온 삼나무다. 조몬스기는 측정 방식에 따라 7천2 백세라고도 하고 2,170세라고도 하는데 나이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무려면 어떠랴 어차피 수천 년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타계한 야쿠시마의 구도자 야마오 산세이는 조몬스기가 '버펄로처럼 보이기도 하고 인디언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했다. 조몬스기에 빗대어 '성스러운 노인'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기도 했다. 설레었던 조몬스기를 막상 마주하자 외려 차분해지는 건 왜일까. 사람들은 신성한 나무 앞에 가까이 다가서거나 만져 볼 수 없다. 전망대에 서서 그저 바라 볼뿐이다.


야쿠스기의 숲에는 조몬스기 외에도 부부삼나무와 윌슨 그루터기, 대왕삼나무, 삼대목 등이 유명하다. 나무들은 저마다 천 년을 넘게 묵은 사연을 품었고 그 스토리들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하지만 어떤 삼나무도 그 숲의 일부일 뿐이다. 이름 있는 나무들은 사진으로 남고 이름 모를 나무에 덮인 이끼들은 가슴에 남는다. 숲을 걸으며 나무와 바위에 덮인 이끼들을 손으로 자꾸 만져본다. 섬의 햇볕과 안개와 바람을 머금은 이끼는 한없이 부드럽고 촉촉하다. 이름 난 나무들은 탐방객들을 목적지까지 이끄는 이정표일 뿐이다. 야쿠스기의 숲은 그저 숲으로 충분하다.


한동안 숲을 오르내리던 길은 느닷없이 철길로 이어진다. 이 협궤 철길은 벌채한 삼나무를 운반하기 위해 1923년에 놓였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경사로를 걷다가 평지로 이어진 철길을 걸으니 산책을 나온 듯 발걸음이 가볍다. 철길 옆으로 우당탕 계곡물이 흐르고, 까마득한 삼나무가 좌우로 빼곡하다. 양지바른 철길 곳곳에 원숭이 무리가 모여 앉아 회합 중이다. 그들을 방해하지 않으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인다. 이끼 사이를 기어 다니는 투명하고 푸른색 껍질을 가진 게와 어린아이 머리 크기만 한 두꺼비가 이채롭다.



철길을 지나 다시 돌과 나무뿌리로 얽힌 오르막길을 오른다. 시라타니운스이 계곡으로 들어서는 마지막 관문이다. 고개를 넘자 숲은 깊이를 모를 안개에 먼저 점령당해 있었다. 짙은 안개 사이로 터무니없는 크기의 삼나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 주위를 서성였다. 나무들 사이를 구르다 멈춘 화강암 바위들이 육중하게 길을 막아섰다. 이끼는 늙었거나 젊은 나무들을 솜사탕처럼 감쌌으며, 솜이불처럼 바위를 덮었다. 이끼는 숲을 가만히 덮은 채 깊은 안개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그려왔던 숲. 그 숲에 내가 섰다.


시작도 끝도 없는 숲은 깊은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이곳은 숲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불려야만 할 것 같았다.  <흑과 다의 환상>을 쓴 작가 온다 리쿠와 야쿠시마에서 <부운>을 쓴 하야시 후미코 그리고 <원령공주>를 만든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들의 작품에 만족했을까. 그들은 그들이 느낀 야쿠스기의 숲을 얼마나 표현할 수 있었을까.


나는 산을 오르는 내내 무게로 인한 압박감으로 카메라와 렌즈를 산 아래 계곡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해야 했다. 하지만 그 카메라 덕분에 숲에서의 어설픈 기록을 남겼다. 시간이 흐르면 오르막길에서의 고통은 잊힐까. 망각의 힘에 추억의 최면을 보태어 다시 숲을 찾을지도 모르지. 숲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한 나는 이미 숲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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