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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 Nov 17. 2018

원령공주와 1박 2일

야쿠시마의 시라타니운스이쿄 숲을 찾아서 - 1

후두득.

나무로 이은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잠을 깼다. 새벽 4 시.  내가 눈을 뜬 곳은 신다카츠카 무인산장의 목조로 된 2 층 침상이다. 전기도 통신도 끊겨 심연의 어둠만이 존재하는 곳. 몸에서 쉰내가 났다. 전날 밤 땀에 젖은 몸을 씻지 못한 채 애벌레처럼 침낭에 들어가 잠이 든 때문이다. 아래층과 건너편의 침상에 빼곡히 누운 각국의 남녀 등반객들이 서로의 어깨를 부대며 나지막이 코 고는 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야쿠시마에 도착한 건 이틀 전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일본 본토 최남단 가고시마에 내렸다. 다시 배로 두어 시간 남짓 달려 야쿠시마에 도착했다. 제주도의 1/3 크기라는 동그랗고 뾰족한 섬 야쿠시마. 미야자키 하야오의 사주를 받은 원령공주가 주술처럼 나를 유혹한 곳. 신비의 숲 시라타니운스이쿄와 그 부근에 사슴 2만 마리, 원숭이 2만 마리 그리고 2만 명의 사람이 산다는 곳.(실제로는 인구 1만 3천 명이 거주하며 사슴과 원숭이의 정확한 숫자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내 두 다리로 소복한 이끼를 딛고, 칠천 년을 살았다는 조몬스기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아득히 떨어지는 치히로 폭포를 카메라에 담고 싶었던 곳.


하지만 그 숲에 가기 위해서는 산을 올라야 했다. 대부분의 탐방객들이 시라타니운스이쿄 숲을 당일로 돌아 나오는 코스를 택한다.(현명한 분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숲의 맞은편 요도가와 등산구(1400m)에서 야쿠시마의 가장 높은 곳 미야노우라다케(1936m)를 거쳐 시라타니운스이쿄(600m)로 내려오는 코스를 택했다.(아무래도 우린 좀 모자라는 것 같다) 신다카츠카 산장(1500m)에서 하루를 묵어야 했으므로 숙박에 필요한 침낭과 이틀 치 식량을 배낭에 짊어져야 했다. 나는 거기에 무거운 카메라까지 얹었다.(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오르는 길에는 녹차밭처럼 관목이 빼곡했고 트래킹족들은 주로 그 사이를 지난다. 어떤 길은 관목의 높이가 허리춤에 닿았고 때로는 내 키를 훌쩍 넘는 크기로 도열했다. 아침과 점심은 민박집에서 싸 준 도시락을 길 위에서 먹었는데 찰진 주먹밥을 마른 목으로 삼키기 어려웠다.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다리는 무거웠지만 시야는 트였다. 야쿠시마의 산은 봉우리마다 바위를 이고 있다. 바위들은 때론 노부부가 마주 보는 형상으로, 때론 고다마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고 저마다 개성이 넘쳤다. 나는 이번 산행을 앞두고 유튜브를 통해 연마한 각종 등산 기술인 스틱사용기법, 상황별 보행기법, 음식물 섭취법 등을 실전에서 현란하게(?) 구사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기술로도 날렵한 몸매와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오르는 30대 젊은 친구들의 체력을 따라잡기 힘들었다.



원숭이들은 양지바른 곳에 모여 앉아 서로의 몸을 다듬어 주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찬찬히 구경했다. 사슴들은 관목들 사이로 고개만 삐쭉 내밀고는 나뭇잎을 요란하게 흔들며 어디론가 흩어졌다. 한 달이면 35일 비가 내린다는 곳, 늘 태풍이 지나는 길목이라지만 오늘만큼은 날씨가 화창했다. 여행의 성패는 날씨가 절반은 좌우한다더니 축복받은 날이다. 하긴, 비 마저 내렸다면 내가 더 오를 수 있었을까. 식수는 계곡이나 샘물을 받아먹었고, 준비해 간 간식을 허리춤의 벨트백에서 틈틈이 꺼내 먹었다. 하지만 정작 힘겹게 가져 간 카메라는 꺼내어 찍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배낭을 내려 카메라를 꺼내어 사진을 찍고 다시 배낭에 넣는 일을 반복하다가는 일행과의 거리가 너무 벌어지지 않을까 염려됐다. 이러려고 무거운 카메라를 넣어왔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야쿠시마의 일부 지역은 1993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수령 수천 년을 넘는 야쿠스기가 뛰어난 자연경관을 만들어 냈다. 둘째, 아열대(오키나와) 지역에서 아한대(홋카이도) 지역까지의 식물이 해안선에서 산 정상에 이르기까지 연속으로 분포해 있다. 즉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일본 열도의 식물분포가 하나의 섬에 응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셋째, 각지에서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는 조엽수림이 원생림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 조현제 저 <원령공주의 섬 야쿠시마>에서 발췌



끝나지 않을 듯했던 오르막길은 한 발 한 발 디디 걷기를 무한 반복하자 어느덧 야쿠시마에서 가장 높은 곳 미야노우라다케에 이르렀다. 사방에 산봉우리가 솟구쳐 올랐고 뭉게구름이 발아래로 흘렀다. 섬 언저리에서 필리핀해의 파도가 청명한 가을 햇살을 튕겨냈다. 정상에 오르자 성취감보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해외에서의 첫 트래킹에 대한 기대감만큼 두려움도 컸던 모양이다. 다시 내리고 오르기를 반복해서 신다카츠카산장에 도착하자 이미 해가 저문다. 저녁 식사를 위해 모여 앉은자리, 일행 중 가장 늦게 도착한 분에게 자리를 비켜주며 합석을 권했다. 이 여성분이 배낭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자 모두들 아연실색하며 놀라 자빠졌다. 산행과 생존에 꼭 필요한 물품이 아니라면 단 100그람이라도 줄이려 노력한다는 배낭에서 다름 아닌 '캠핑용 의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2편으로 계속 https://brunch.co.kr/@mulpure/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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