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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X년 여름, RIMPAC의 무대인 태평양은 기만적일 만큼 평온했다.
수면 위를 가득 메운 각국 함정들은 마치 자로 잰 듯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파도를 갈랐고, 그 마스트에 걸린 깃발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일한 크기로 펄럭였다.
수평선 너머에서 바라보는 이 바다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고 공평한 기회의 영토처럼 보였다.
하지만 브리핑실의 무거운 철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런 심미적인 착각은 난도질당하며 사라졌다.
전면을 가득 채운 대형 스크린에는 압도적인 물리력을 과시하는 항모전단의 전력이 도표화되어 있었다. 핵추진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이지스 순양함과 구축함이 겹겹이 성벽을 쌓았고, 그 위를 대잠헬기와 장거리 초계기가 촘촘한 그물망처럼 덮고 있었다. 운용 개념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명확했으며, 전력 설명은 지나칠 정도로 상세했다. 장내의 누구도 입을 열어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것은 완벽하게 설계된 정답지였기에, 의문을 가질 필요조차 없는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웠다.
대한민국 해군의 잠수함 함장, 김도현 소령은 조명이 닿지 않는 뒤쪽 구석 자리에 몸을 묻고 있었다.
발표를 주도하던 미 해군 장교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Opposing submarine is diesel-electric. Limited endurance. Likely ambush profile.”
(대항군 잠수함은 디젤-전기 추진 방식입니다. 잠항 지속 능력에 한계가 있죠. 아마도 특정 구역에 매복하는 프로파일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어지는 슬라이드는 더욱 노골적이었다.
Classic Type-209 operational pattern.
(209급 잠수함의 전형적인 작전 패턴)
화면에는 디젤 잠수함의 전형적인 기동 방식들이 나열되었다. 극저속으로 접근하여 소음을 죽이고, 수온이 급격히 변하는 열층 하부에 숨어 대기하며, 목표가 사거리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인내하는 장시간의 매복.
김도현은 그 문장들을 마치 자신의 치부처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교범이 그대로 스크린에 복제되어 있었다.
뒤를 이은 다른 장교의 덧붙임은 쐐기를 박는 듯했다.
“We’ve seen this before.”
(이미 수없이 겪어본 유형입니다.)
설명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더 이상의 분석은 무의미하다는 듯 브리핑은 끝났다.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각국 장교들 사이에서는 화려한 숫자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누군가는 함재기의 경이로운 출격률을 떠들었고, 다른 이는 핵잠수함의 무제한에 가까운 순항 기간을 자랑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거대한 작전 반경과 압도적인 탑재 무장이 대화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었다.
식판을 들고 앉은 김도현의 옆자리에서 한 장교가 말을 건넸다.
“Korean submarine?”
(한국 잠수함입니까?)
“Yes, that’s right.”
(그렇습니다.)
상대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입가를 올렸다.
“Excellent platform. Very quiet. Good for coastal defense.”
(훌륭한 플랫폼이죠. 아주 조용하고. 연안 방어에는 그만한 게 없습니다.)
그것은 칭찬의 형식을 빌린 선언이었다.
이 광활한 대양은 당신들의 연안이 아니며, 당신들이 설 자리는 이곳이 아니라는 선언. 김도현은 대답 대신 묵묵히 음식물을 씹었다.
그의 아버지 역시, 이 낯선 바다에 발을 들인 적이 있었다. ROKS 장보고함의 함장으로서 이 거대한 훈련의 일원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의 작은 잠수함은 누구의 경계 대상도, 관심의 중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무관심은 역설적으로 거대한 함대 근처까지 다가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그렇게 소리 없이 접근했기에, 아버지는 여러 차례 미 항모를 상대로 ‘격침’ 판정을 기록하는 전설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이번 브리핑 자료에는 과거에 없던 별도의 항목이 신설되어 있었다.
Legacy Korean Diesel Tactics.
(한국 해군의 구형 디젤 잠수함 전술)
아버지의 일생이 담긴 변칙적인 수수께끼들은 이제 ‘과거의 전술 사례’라는 이름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공유되고 있었다. 이제 은밀함은 상대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변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분석이 끝난, 관리 가능한 분류 항목 중 하나에 불과했다.
잠항 후 6시간이 경과했다.
“음탐실 보고. 상공 항공 소음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소노부이 투하 패턴으로 분석됩니다.”
음탐장의 보고를 받은 작전장이 상황도를 넘기며 긴장된 목소리로 덧붙였다.
“외곽 차단 구역을 형성하려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김도현이 나직하게 명령했다.
“속력 2노트 유지. 열층 하부 유지. 상층 다층 탐색 대비한다.”
열층 아래는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위에서는 여러 층으로 깔린 소노부이와 간헐적인 디핑 소나가 물속을 더듬고 있었다. 잠수함은 교범이 지시하는 정석대로, 마치 박제된 표본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8시간째.
“기관장.”
“배터리 잔량 52%입니다. 현재 상태를 유지할 경우 최대 10시간 운용 가능합니다.”
다시 10시간이 흘렀다.
“헬기 접근 소음 확인. 디핑 소나(dipping sonar)로 추정됩니다.”
작전장이 땀에 젖은 손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며 결과를 내놓았다.
“현재 위치에서 목표 지점 접근까지 최소 6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김도현은 폐쇄된 함 내의 공기를 한 번 깊게 들이마신 뒤 결정했다.
“현 상태를 유지한다.”
잠항 12시간.
함 내의 산소 농도가 떨어지며 공기는 점차 납처럼 무거워지고 있었다. 소음을 죽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야속하게 흐르는 시간만은 죽일 수 없었다.
“배터리 41%.”
멀어지던 헬기 소음이 다시 머리 위를 짓누르듯 다가왔다.
음탐장이 보고했다.
“소노부이의 투하 간격이 좁아지고 있습니다.”
작전장이 신음하듯 낮게 읊조렸다.
“외곽 탐색망을 우리 쪽으로 조여 오고 있습니다.”
목표물은 여전히 어뢰 사거리 밖에서 유유히 항해 중이었다.
14시간.
“기관장.”
“잔량 34%입니다. 3시간 뒤에는 반드시 스노클을 해야 합니다.”
디젤 잠수함에게 스노클은 충전이 아니라 치명적인 노출을 의미했다. 작전장은 결국 펜을 내려놓고 계산을 멈췄다.
“현재 위치에서 사격해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 이상 접근을 지속하면 이후 이탈 경로 확보조차 곤란해집니다.”
잠수함 내부가 가라앉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김도현은 푸른빛을 내뿜는 전술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거대 항모전단은 우아할 정도로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탐색망이 수학적인 격자무늬처럼 촘촘히 펼쳐져 있었다. 아버지는 그 격자의 허술한 바깥에서 기회를 엿보며 기다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격자 그 자체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이동하며 잠수함을 압박하고 있었다.
“접촉 포기.”
김도현의 입에서 떨어진 명령에 부장이 지체 없이 확인했다.
“이탈 절차 진행하겠습니다.”
잠수함이 패배를 인정하듯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그 찰나, 음탐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헬기 근접! 현재 우리 위치에 탐색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탈 결정이 한 발 늦었던 것인지, 아니면 적들이 정확한 시점을 꿰뚫고 있었던 것인지, 함 내의 누구도 그 문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후 브리핑실에 띄워진 결과 보고서는 참혹할 정도로 간결했다.
Submarine unable to achieve firing solution.
(잠수함이 사격 제원을 확보하는 데 실패함.)
Forced to withdraw due to energy state.
(에너지 부족으로 인해 강제 이탈함.)
슬라이드가 가차 없이 넘어갔다. 미 해군 장교가 덧붙인 코멘트는 비수와 같았다.
“The withdrawal profile perfectly matched the expected pattern.”
(도주 프로파일이 예상된 패턴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옆에 있던 다른 장교가 냉소적인 어조로 거들었다.
“Typical diesel ambush tactics.”
(전형적인 디젤 잠수함의 매복 전술이군요.)
잠시 후, 화면 하단에 이번 훈련의 최종 평가가 붉은 글씨로 나타났다.
Predictable.
(예측 가능함.)
예측 가능함. 그것으로 회의는 끝이었다. 사람들은 곧장 다음 시나리오로 주제를 옮겨 항모의 항로와 항공 전력의 재배치를 열띠게 논의했다. 한국 잠수함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모든 분석과 설명이 끝난, 더 이상 궁금할 것 없는 낡은 대상처럼 취급되고 있었다.
김도현은 모두가 떠나가는 브리핑실에 마지막까지 남아 자리를 지켰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들이 한국 잠수함을 무시하거나 얕잡아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우리가 어디에서 숨죽여 기다릴지.
우리의 인내심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언제쯤 포기하고 돌아설지까지.
작은 해군이 마주하는 가장 참담하고 불리한 순간은 조롱당하거나 무시당할 때가 아니었다.
상대에게 모든 패를 읽히고, 이미 ‘이해’되어 버린 순간이었다.
SS-I 장보고급
SS-II 손원일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