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불편한 주제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는 행위가 부를 역효과에 대해 생각한다.
자극적인 것,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것에 대해서.
하지만 곧이어 허용된 주제에 대해서만 생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공허한지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의외로 불편한 것이 왜 불편한지 모른다. 본능적으로 불편한 것을 굳이 건드려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회적인 효용도 크게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불편한 것을 불편한 것으로 한쪽으로 밀어두고 신경 쓰지 않는다면 불편한 것은 영원히 불편한 것으로 남지 않을까? 그것을 이해하고 해부하려는 노력 없이 해소되는 것이 가능할까?
모든 이들이 그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들 개인의 모자람이 아니라 삶의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현재 상황을 버티느라 버거워 다른 곳에 쓸 에너지가 없는 상태일 수도 있고, 그러지 않기를 택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다름이지 틀림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생각할 여력이 있고 불편을 해소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는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의도적으로라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은 시작점이다. 모든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그 행동이 명확한 의미와 유의미한 결과를 가지길 바란다면 생각해야 한다.
표면적으로 다른 누군가가 생각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도가 크다. 100퍼센트 옳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다. 실은 100퍼센트 옳은 생각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수만 명의 사람이 있다면 수만 명의 관점과 그들이 겪은 것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들 각자의 시선은 완벽할 수 없다. 따라서 완전한 생각으로 향하려면 모든 이들이 보완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드러내야 한다. 부딪치기 전에는 누구도 타인과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충돌할지 알 수 없다. 상상도 못 했던 지점에서 부딪치고, 그 충돌이 일리 있어 보이는 시점이 올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부딪침이 꼭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형태일 필요는 없다. 시선과 의견은 시선과 의견이고, 그 인간 자체의 가치와 동일하지도 않다. 한 시선은 그 인간의 시선이 겪은 것만을 대변할 뿐이고 그 사람의 인생에서는 그 시선이 옳을 만한 사건이 있었을 뿐이다.
개인의 시선은 개인의 시선이다. 따라서 다른 누구도 나의 생각을 대변할 수 없다. 나와 아주 많이 닮아 보이는 누군가도 특정 부분에서 나와 완전히 대비되는 지점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누구도 다른 누군가의 생각을 대변할 수 없다. 그렇기에 다른 누군가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완전히 덮어쓸 수는 없다.
개인의 생각을 존중하고 중요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