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인류 최대의 난제.
우리는 설명할 수 없지만 어쨌든 기분이 간질간질한 상태를 낭만이라고 부른다. 이 낭만은 뭘까? 왜 설명할 수 없을까?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낭만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혹은 낭만이라는 것 자체의 구조가 설명을 가능하게 하는 형태가 아니도록 설계되어 있을까?
설명하고, 이해할 수조차 없으면서 왜 우리는 낭만에 목숨을 걸고 때로는 이성적으로 옳지 못한 선택을 할까? 판단을 앞지르는 이 위험한 자극을 우리는 왜 숭배할까.
혼자 바다를 보러 가는 것. 이룰 수 없는 꿈을 한쪽 구석에 가지고 사는 것. 데이트 직전에 꽃을 한 송이 사드는 것.
기본적으로 낭만이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명확한 이유가 없고, 그 주체 또는 피주체도 왜 긍정적인 기분이 드는지 모르는 상황에 부여되는 것 같다. 그들 자신도 이해할 수 없지만 단순한 행위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는.
심지어 비효율적일수록 그 강도가 강해진다. 이 거대하고 명징한 생존 본능의 배반.
혼자 바다를 보러 가는 일은 실제로 처한 상황에 아무런 직접적 도움을 주지 않지만 어쨌든 내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다. 시간과 돈이 소모되는, 다른 목적이 없는, 온전히 나를 위한 일을 하고 있다는 감각이 스스로의 능력을 믿을 수 있게 하는 걸까. 그렇다면 이 경우 낭만은 자존감 회복을 의미할까?
이룰 수 없는 꿈을 가지고 사는 것은 어쨌든 나를 버리지 않는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괴롭더라도 끌어안고 사는 일. 버리지 않기로 택하는 일. 이것 또한 자존감의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데이트 직전에 꽃을 사는 것은 가장 흔하고 사소한 낭만이다. 이는 조금 더 복잡하다. 낭만을 느끼는 주체가 둘이기 때문에. 꽃을 주는 주체는 받는 주체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다는 자기효능감. 꽃을 받는 주체는 내가 이렇게 사랑받고 있다는 감각. 이 둘 모두 자존감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그럼 결국 낭만은 자존감 회복이라는 지극히 평범하고 이기적이기까지 한 요소로 이루어진 현상인가?
그것을 입 밖으로 내거나 자각하는 행위가 부끄러워 아예 인식조차 하지 않으려는 인지 구조의 자기방어기제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직접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걸까?
어쩌면 낭만은 이렇게 극히 비효율적인 일로라도 나는 나의 자존감을 돌볼 시간과 자원과 여력이 있다는 증거로서의 기능일까?
… 이런 가정이 낭만의 가치를 떨어뜨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