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덕분이다.
빵이는 오늘도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오히려 빵이에게 '한국 학교의 겨울이 더 따뜻하지 않을까?'란 생각도 해봤다. 오늘은 유달리 더 졸려하는 것이 일주일치 낮잠 못 잔 피로가 쌓였나 보다.
지도실에 자료들을 찾아보다가 한글 공부에 대한 책들을 발견했다. 대화를 하지 않으니 아이의 언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잘 안 됐기에 책을 발견하고는 기뻤다. 그러나 빵이는 책을 보자마자 이내 표정이 굳는다. 몸은 뒤로 빠지고 하기 싫어하는 표정을 숨길 수가 없다. 역시 본능적으로 공부하자는 것을 아는 것이다. 싫지 싫어. 이해한다만.
"빵아~ 올바른 문장에 동그라미 치는 거야! 이거 마치면 우리 피아노 치러 가자~"
이렇게 겨우 요즘 빵이가 좋아하는 피아노로 관심을 끌었다. 앞으로 한글수업은 책보다는 카드 위주로 주문한 공책이 오면 카드 한 장으로 '단어'에서 '문장'까지 심도 있게 가르쳐 볼 생각이다. 비록 우리가 세 달 정도의 유한한 시간이지만, 그래도 언어 환경에 노출되어 있으니 빨리 적응할 것이라 믿는다.
나의 빵 위에 대한 언어적 목표는 "문장으로 일상대화 하기"
빵이를 보며 나를 돌이켜본다. 나 역시 인도네시아에서 2년을 있으면서도 단어구사와 3살 아이가 할 법한 문장 구사 정도밖에 못했기에 그런 나보다 빵이는 훨씬 더 똑똑하다 생각한다. 아마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더 빡시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속으로 답답해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도 훌륭해!'
이런 여유 있는 마인드가 교사에게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차피 때가 되면 알게 될 텐데, 마치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지 못하면 무능하다 생각하기 쉬우니까. 지금의 나의 교사관은 공부보단 사랑을, 나를 알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공부를 가르쳐 주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이전에 교사시절 정해진 교육과정과 교과서대로 서둘러 주입하기 바빴다. 교대를 졸업하자마자 교사가 되었고 혈기왕성한 그때는 그저 정해놓은 그것대로 빠른 시간에 더 쉽게 도달하는 것이 최상의 목표였으며 나의 능력이라 생각했다.
이제 그때보다 나이도 먹었고, 세상일이 내 맘대로 흘러가는 건 아님을 알기에 우리 아이들이 필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든 살아갈 수 있는, 그리고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사랑을 받고 사랑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이 여느 과목보다 더 중요하다. 정말 생존 상황이 왔을 때 내 지식보다 필요한 것은 적응력이니까. 세상은 혼자 살 수 없기에 그런 능력이 더 필요한 것 같다.
마흔 가까이에 인도네시아에 뚝 떨어져 홀로 살아가야 했을 때,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일을 하고 살아가는데 나의 지식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우버택시 하나를 부르는 상황에서조차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려웠으니까. 말이 통하지 않아도 오픈마인드와 적극성은 생존하게 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과 용기. 할 수 있을 거라는 자기 믿음.
빵이 와 수업을 마치고 피아노를 치러 갔다.
도레미파솔라시도 손가락 바꾸는 연습을 열심히도 했는지, 피아노 의자에 앉자마자 보란 듯 쳐본다.
내가 피아노 배울 때처럼 오른손 왼손 연습을 하려는데 자꾸 마음이 앞서가는 빵이다. 아파트를 쳐달란다.
"빵아, 아파트는 선생님도 못 쳐. 일단 악보부터 찾아볼게 ㅎㅎㅎㅎ"
음계연습을 조금 하더니 모르는 노래를 검지로 친다.
"무슨 노래야?"
"몰라요"
"어디서 들었어?"
"틱톡..."
그러고는 재빨리 폰을 검색하더니 들려준다. 일본 애니메이션 노래 같은데 제목은 보이지 않는다. 빵이는 음악적 감각도 있나 보다. 음을 듣고 피아노로 치는 걸 보니. 참 여러모로 똑똑이다.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교장선생님께서 살며시 지나가다가 우리를 발견.
"교장선생님, 학교에 여분의 멜로디언이 있을까요?"
"아, 아마 자료실이나 1학년 쪽에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한번 찾아볼게요."
빵이는 복도 많다.
내가 빵이의 도우미 교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다 교장선생님의 중도입국학생에 대한 관심덕택이었다. 이렇게 사소하게 필요한 것도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친근한 교장선생님.
결론적으로 빵이는 복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