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끽하지 않는 삶을 견딜 수 있게 될까요
뉴욕은 늦가을, 초겨울부터 축축하고 오한이 도는 날씨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블리자드가 두어개 지나가고, 눈이 녹아 온 골목이 지저분해질 즈음 봄이 건조하디 건조한 봄이 옵니다. 태풍이 남은 빗줄기를 돌풍에 섞어 뿌려대는 날씨를 보니 유독 을씨년스러웠던 뉴욕에서의 가을이 생각나네요. 그러고 보니 지금은 아니지만 뉴욕에서는 가을 겨울에 더 심한 우울증을 겪었던 것도 같습니다. 뉴욕 하면 떠오르는 대다수의 장면들이 손가락이 시린 어느날 도서관 뒤에서 혼자 담배를 피우던 시간들이거든요. 아니면 소호의 밤거리를 혼자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던가, 문 닫기 직전의 하이라인 파크를 걷던가, 어찌되었든 늘 날씨는 추웠습니다. 경험상 우울증이 심한 시기의 기억은 대부분 지워지는데 특히 통증처럼 날카로웠던 삽화를 겪던 순간순간만큼은 강렬하게 떠오릅니다. 아마 어떤 기억의 선명도 자체가 다른 기억들과의 상대적인 선명도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울증이 심했던 시기에는 퓨즈가 불타오르듯 찾아오는 우울감을 뛰어 넘는 희열 같은 걸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장 절망스러웠던 순간들만 주로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봄, 여름에는 그래도 만끽했던 기억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피어의 잔디밭에 누워 차이티 라테를 마시며 하늘을 보던 일, 외딴 섬에 지어진 커다란 이케아에 가기 위해 전용 보트를 타고 바닷바람을 만끽하던 일, 메트로폴리탄 전시를 보고 나와 레이디엠이나 라뒤레에서 달콤한 과자를 사 센트럴파크에서 혼자 먹던 일, 미친 듯이 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유니언 스퀘어에서 허드슨 강변까지 뛰어갔다온 일, 윌리엄스버그의 벼룩시장에서 독특한 실크
셔츠를 사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프렌치토스트를 먹었던 일. 그 순간들의 나는 너무 행복합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 순간을 떠올리는 지금 이 순간, 현실의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행복합니다. 그래서 즐거운 회상의 끝에는 혀가 끊어질 것 같은 씁쓸함이 남습니다. 행복하려고 남긴 기억들인데 왜 나는 학습된 절망감으로 마무리짓게 될까요.
그래도 지금은 행복한 편입니다. 예전에는 너무 많은 것에 죄의식을 느끼고, 너무 많은 마음의 짐을 짊어들려고 아둥바둥 애쓰느라 불행했다면, 지금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은 짊어지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느낄 때도 많습니다. 내게는 나만의 공간과 시간적 여유가 있고,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한 활동들을 할 선택지도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런 사치가 나를 망치고 있는 걸까, 하는 쓸데 없는 생각도 합니다. 내가 정말 무언가가 절박했다면, 그래서 무언가를 하는 줄도 모르고 후루룩 살아가고 있었더라면 절망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비관하거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낙담할 여유도 없이 바쁘게 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합니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를 밀어붙이는 스타일입니다. 무언가에든 몰입하도록 말이에요. 미련할 정도로 밀어 붙입니다. 의사선생님은 어떻게 그런 증상들을 겪으면서도 병원을 찾지 않은 채 고시 공부를 풀타임으로, 학교 공부와 병행할 수가 있었느냐고 진지하게 물어보셨습니다. 나 자신을 다그치는 내적 동기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고 덧붙이시면서요.
나는 만끽하거나 매몰되지 않으면 살기가 싫어지는 사람인 것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만끽에는 용기가 필요하니까 나 같은 겁쟁이는 매몰되길 택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겠느냐고도 말했죠. 선생님은 매몰되는 것도 어차피 지속가능하지는 않다는 걸 알지 않냐고 되물으셨습니다.
내가 영화 월플라워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면들은 저마다 깊은 상처를 지닌 등장인물들이 연대하고 행복하게 현재를 만끽하는 장면들입니다. 음악에 미치거나, 약에 취하거나, 속도를 만끽하거나, 아무튼 무언가의 힘을 빌려 현재의 행복감을 만끽합니다. 물론 만끽할 수 없는 순간에는 어리석은 방법으로 스스로를 매몰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샘은 자신을 제대로 사랑해주지 않는 남자와 끊임 없이 연애를 함으로써, 패트릭은 광대놀음을 함으로써, 찰리는 트라우마 증상에 시달림으로써 매몰됩니다.
월플라워의 가장 중요한 대사는 앤더슨 선생님의 입에서 나와 찰리를 통해 샘에게 전해집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랑을 받아들인다’. 여러 해가 지나 다시 보며 곱씹어도 완전히 소화되지 않는 질긴 대사입니다. 나는 내가 받아 마땅할 사랑을 어떤 식으로든 거부하고 있는 걸까요? 그 사랑에는 나 자신에 대한 사랑도 포함되는 걸까요?
돌아보면 내가 입밖으로 가장 많이 내뱉는 말은 ‘아냐 난 할 수 있어’인 반면 가장 많이 되뇌이는 말은 ‘어차피 나는
안 될 거야’입니다. 스스로도 그걸 알고 있고, 더 이상 ‘나는 안 될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욕심을 버려왔습니다. 지켜야 할 것이 없다면 무언가가 되지 못해서 문제될 이유는 없습니다. 나의 합리적인 자아는 그런 계산에 따라 몇 수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감상에 빠진 자아는 멍청한 고집을 굽히지 않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설득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내가 저절로 그런 삶을 살게 되지 않는 한 만끽하지 않는 삶을 스스로 선택하지는 않을 겁니다. 불건강한 상태에서 내뱉은 말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내 삶에 딱 7년만 남았다고 생각하고 감상에 빠진 자아를 협박해볼 셈입니다. 앞으로 네가 살 날은 지금까지의 고작 1/4에 불과하다고. 자기연민에 빠져 어영부영 살다가 죽어 버릴 거냐고. 만끽하는 삶을 살기 위해 모든 걸 쏟아붓기 시작할 때까지 스스로를 설득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