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물러설 곳이 없다.
작년 5월, 13년 4개월을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했다.
그리고 올해 4월, 나는 또 한 번의 이직을 앞두고 있다.
작년 이직 이후, 한동안 심란한 시간을 보냈다. 출퇴근 시간 왕복 3시간은 육체적으로 힘들었고, 늘 화가 나있는 대표님과, 내가 예상한 역할과 회사가 기대하는 역할 간의 괴리감과, 회사의 성장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은 나를 정신적으로 힘들게 했다.
오랜만의 이직을 경험한 지인의 얘기에 따르면, 본인도 한 3개월 정도는 심란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3개월 정도면 이 심란함이 잦아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회사는 6개월의 수습기간을 두고 있었는데, 나보다 좀 더 먼저 입사한 사람들의 수습 통과율은 매우 저조했고, 주변엔 수습 연장자들이 넘쳐났고, 수습기간 통과에 실패하여 짐을 싸서 나가는 사례도 있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과연 나는 수습통과가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회사에 대한 정을 붙이기는 어려웠다. 나는 수습평가를 다행히도(?) 무사히 통과했지만, 회사는 내 마음 속에서 나의 수습평가를 통과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마침내 결심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올해 초부터 나는 출퇴근길에 구직사이트를 살피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지원해볼만한 후보 회사를 찾고, 회사에 대해 조사하고,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이 나이에, 이제와서, 포트폴리오라는 걸 만들게 될 줄이야.)
이직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나는 내 자신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너는 혹시, 도망치는 중이냐고. 해볼 수 있는데까지 시도하고 도전해보기보다, 혹시.. 비겁하게, 겁장이처럼, 도망치는 중이냐고.
이 곳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해서 의욕을 잃은건지, 나이가 들어가면서 열정이란 게 식은건지, 지난 회사에서 이미 지칠대로 지쳐 번아웃이 된건지.. 어쩌면 세 가지 모두가 다 해당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의 열정은 예전같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고 지금의 회사에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불쏘시개를 찾지 못했다.
경기침체로 채용시장이 얼어붙고 있다는 시점에 다행히도, 나는 내가 생각한 최소 조건을 만족하는 회사에 최종 합격했다. 집과 가까울 것(=> 분당), 회사 평점이 3점 이상일 것(=> 3.1), 성장 가능성이 있을 것(=> Pre-IPO 단계의 의료기기 회사). 절실하면 길이 있나보다, 하늘이 나를 버리진 않았구나. 하지만 이 곳도 심란한 곳이면 어떡하지? 나의 이 심란함이 가라앉지 않으면 어떡하지?
이젠 어쩔 수 없다. 나는 이제 새로운 그 곳에서 어떻게든 버티고, 생존해야 한다. 나는 이제 회사에서 뽑고자 하는 포지션과 꼭 맞지 않으면 뽑기 부담스러운 경력과 나이가 되었을 뿐이고, 그 흔한 유학파도, 내노라 하는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어서, 이젠 또다시 잡초같은 근성과 성실함을 무기로 새로운 세월을 쌓아 나를 입증해 나가야 한다. 퇴로는 없다,는 마음으로 새로운 회사에 임하기로, 오늘도 마음을 다잡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