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사계절이 피는 산장 (1)

by 달빛타래

“웬디 씨, 일은 오늘까지만 나오면 됩니다.”

“... 네, 알겠습니다.”

웬디는 손에 쥔 동전 트레이를 내려놓고 답했다. 느닷없는 해고 통보에 웬디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올 게 왔구나.’하는 생각과 빠른 체념이었다. 매니저는 별 말 없이 수긍하는 웬디의 모습이 퍽 당황스러웠는지, 부탁하지도 않은 해고 사유에 대해 읊어댔다. 하지만 매니저의 뒤에서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는 손님들이 더 신경 쓰인 웬디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돌려보냈다.

1년 전, 그녀가 일하던 마트에서 세 블럭 떨어진 거리에 대형 프렌차이즈 마트가 설립되었고, 그로 인해 동네 매장 수준에 불과했던 마트의 이익이 급격히 떨어졌다. 마트에서는 깜짝 할인과 덤을 얹어주는 행사를 열며 활기를 되찾으려 했지만, 행사 기간에만 잠깐 매출이 반짝할 뿐, 손해는 메워지지 않고 오히려 늘었다. 그 여파로 몇 달 전부터 직원들이 순차적으로 해고 통보를 당했고, 오늘은 그저 웬디의 차례였을 뿐이다.


퇴근 시간인 여섯 시가 되자, 웬디는 앞치마 끈을 풀고 탈의실 옷걸이에 걸어놨다. 행거 위에는 이미 주인을 잃은 앞치마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매장을 나와 걷는 동안, 웬디는 거리를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훑어봤다. 영혼이 사라진 듯한 무표정을 살펴보던 그녀는 자신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사실 웬디에게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일은 익숙했다.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랬고, 유일한 가족이었던 엄마인 메리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지도 10년이 지났다.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고 혼자 남겨진 첫날, 웬디는 엄마가 읽어주던 동화책을 종이 상자에 담고 구인 잡지를 펼쳐야 했다. 누구의 축하도 없이 성인이 된 웬디는 부서진 조각을 이어 붙이듯 삶을 간신히 지탱해 왔다.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밤낮없이 아르바이트를 병행했고, 졸업 후에는 번듯한 직장을 꿈꾸며 서류 더미 속에 파묻혔다.


하지만 세상은 동화책 요정들처럼 친절하지 않았다. 중소기업의 사무직으로 들어갔을 때는 2년이 채 되기도 전에 회사가 부도가 났고, 아이 돌봄 일을 시작했을 때는 학부모의 부당한 갑질에 마음을 다쳤다. 그 외에 식당 서빙, 편의점 등 아르바이트에 전전하다 지금의 마트 직원 자리에 정착했다고 생각했지만, 기어이 해고당한 것이다. 나날이 힘들어지는 하루에 밝은 성격이었던 웬디의 마음에도 딱딱한 굳은살이 박여갔다.


마트에서 도보로 40분 거리에 있는 집으로 향하는 길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다. 사방이 건물투성이인 삭막한 도시에서 유일하게 어린 시절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웬디는 집으로 향하기 전 짧게 공원을 산책하며 답답한 마음을 풀려 했지만, 원래 안 좋은 일은 연이어 닥친다고 했던가.


“으흑흑... 흑흑...”

웬디가 자주 앉던 벤치에 한 여자가 고개를 숙여 울고 있었다. 무릎과 팔꿈치에는 어디에 쓸린 듯한 상처가 나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서글프게 우는 여자의 모습에 지나가던 행인들도 슬쩍 눈길을 주었지만, 다들 못 본 척 지나가기 바빴다. 웬디 역시 이대로 몸을 돌리려 했지만, 흐느끼며 우는 여자에게서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던 과거의 자신이 겹쳐 보였다.


‘정신 차려, 웬디. 너 지금 그거 괜한 오지랖이야. 당장 너부터 직장을 잃은 마당에 누가 누굴 걱정해?’

곧바로 차가운 이성이 머릿속에서 경고했다. 타인의 슬픔에 귀를 기울이기엔 웬디의 주머니와 마음이 너무 가난했다. 하지만 웬디는 몇 걸음도 가지 못하고 멈춰 서고 말았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여유가 없는 어른이 된 걸까?’

예전의 자신이라면, 혹은 엄마와 함께였다면 분명 이 상황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이 불편해진 웬디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온열기 안에 따뜻하게 데워진 꿀물 한 병과 밴드를 구매하고, 다시 벤치로 돌아간 그녀는 여전히 울고 있는 여자의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거라도 마시고 힘내세요.”

웬디는 어색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여자는 고맙다는 말은커녕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짐승처럼 꺽꺽거리는 울음소리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웬디는 뻘쭘하게 서 있다가 ‘그러면 그렇지’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의 처지도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 부리는 호의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새삼 깨달으며, 웬디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20분을 더 걸어 집에 도착한 웬디는 녹슨 열쇠를 꺼내 현관문을 열었다. 곧바로 익숙한 어둠과 웅웅 거리는 냉장고 소리가 그녀를 맞이했다. 보일러를 켜지 않은 실내는 바깥보다 서늘한 냉기를 내뿜었다. 웬디는 답답한 마음에 냉장고를 열고 물병부터 꺼냈다. 컵을 꺼낼 기운이 없어 뚜껑을 열고 그대로 마시자,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후.”

잠깐이나마 숨통이 트인 웬디의 시선에 식탁 위에 올려진 머그컵 하나가 들어왔다. 꽃무늬가 바래고 손잡이가 닳아 있는 머그컵은 엄마가 생전 자주 쓰던 물건으로, 엄마가 떠오를 때마다 웬디가 찬장에서 꺼내 만지작거리곤 했다.


“엄마.”

웬디는 혼잣말을 내뱉으며 말끝을 삼켰다. 그녀는 컵의 테두리를 엄지로 훑었다. 엄마는 늘 이 컵으로 물을 마시며, 설거지는 아침에 해도 된다고 다정하게 말하곤 했다. 그때는 당연하게만 들렸던 그 사소한 배려가, 이제는 세상 무엇보다 그리운 목소리가 되어 가슴을 찔렀다.

웬디는 머그컵을 들고 주변을 살폈다. 이대로 방치하면, 언젠가 부주의로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컵을 안전하게 감쌀 천이나 수건을 찾기 위해 서랍장을 뒤적이던 웬디는 맨 아래 칸 깊숙이 넣어둔 작은 상자를 발견했다.

“이건 뭐지?”

웬디는 상자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상자 위에는 시간이 쌓아 놓은 먼지가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손바닥으로 먼지를 쓸어내리고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오래된 사진 몇 장과 끝이 닳은 리본, 어린 시절 엄마에게 받았던 생일 카드 등이 담겨 있었다.

그리운 눈길로 상자 안을 훑어보던 웬디의 시선은 이내 상자 구석에 있는 작은 봉투에 닿았다. 테두리를 따라 은박이 박히고, 가운데 붉은 꽃 모양 각인이 찍힌 봉투였다. 웬디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켰다. 동시에 기억의 저편에 가라앉아 있던 어린 시절의 조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 *


사위가 어두워질 무렵, 침실 천장에 걸린 전등이 호박색 빛을 뿜어냈다. 방을 따뜻하게 데울 벽난로는 없지만, 튼튼한 창문과 두툼한 이불 덕분에 웬디의 방 안에는 부드러운 온기가 맴돌았다. 창밖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누워있던 웬디는 하얀 물방울무늬가 수 놓인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린 채 조용히 숫자를 셌다. 잘 준비를 마치고 천천히 50까지 세고 있으면 메리가 동화책을 들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잠들기 전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책을 듣는 시간은 하루 중 웬디가 제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47, 48, 49, 50!”

정말로 웬디가 50을 세리는 순간, 문밖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웬디는 오늘도 제 생각이 옳았다고 기뻐하며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웬디, 잘 준비는 끝났니?”

경첩이 내는 오래된 소리와 함께 하얀 잠옷을 입은 메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웬디는 엄마의 손에 들린 낡은 동화책에 시선을 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양치도 했고, 창문도 꼼꼼히 닫았어요.”

“잘했네, 우리 딸.”

메리는 기특한 딸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손때가 묻은 책을 조심스럽게 한 장 넘기자, 사락거리는 종이 스치는 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해가 산 너머로 몸을 숨기고 온 숲이 잠에 든 밤, 푸른 잔디가 펼쳐진 초원 한복판에 깨끗한 호수가 있었어요.”

웬디는 익숙한 도입부에도 집중하여 들었다. 메리의 손에 들린 「은빛 호수의 요정」이라는 동화책은 이전에도 그녀가 몇 차례 들고 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평온하고 부드럽게 내려앉는 엄마의 목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웬디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에 들곤 했다. 덕분에 웬디는 아직도 저 동화의 결말을 몰랐다. 물론 동화책은 거실의 책장에 꽂혀 있어 낮이든 밤이든 읽을 수 있지만, 웬디에게는 엄마의 목소리로 동화가 끝난다는 점이 중요했다.


“... 그때, 길을 잃은 나그네의 귓가에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홀린 듯 노랫소리를 따라 숲을 빠져나온 나그네의 앞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어요. 밤하늘에 뜬 보름달에서 내려온 달빛이 호수를 은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 호숫가에는 비단으로 만든 듯한 날개를 가진 요정들이 호수를 둘러싸며 춤을 추고 있었어요. 요정들은 이름 모를 들꽃을 향해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고, 이슬 맺힌 나뭇잎을 엮어 작은 식탁을 만들었어요. 그들은 보름달이 호수의 정중앙으로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이야기가 끝을 향할수록 웬디의 고개는 어김없이 무거워졌다. 무거운 추가 눈꺼풀에 매달린 듯 자꾸 내려앉았지만, 웬디는 아이답지 않은 인내심을 발휘하며 억지로 참았다.


“드디어 달님이 호수 한가운데에 얼굴을 비추자, 호수 전체가 보석처럼 빛나기 시작했어요. 요정들은 그 빛을 한 방울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서둘러 움직였답니다... 웬디, 자니?”

“그래서요? 요정들은 어떻게 됐어요?”

자신도 모르게 깜빡 졸았던 웬디는 잠들지 않은 척 되물었다. 메리는 그런 딸의 모습을 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후로 요정들은 달빛이 스며든 호숫물을 떠서 작은 잔에 보관했어요. 달빛을 머금은 호숫물은 아주 시원한 포도 맛이 났고, 요정들이 한 모금 마실 때마다 그들의 날개는 별빛처럼 찬란하게 반짝였답니다.”

마침내 이야기가 끝나자, 웬디는 드디어 해냈다는 성취감에 작은 주먹을 꼭 쥐었다. 그러다 문득 낮에 옆집 토니가 요정이나 산타 같은 건 어른들의 시시한 거짓말이라며 콧방귀를 뀌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데 엄마. 세상에 정말로 요정이 있어요?”

웬디의 물음에 메리는 동화책을 내려두고, 전등 빛을 받아 호박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다정하게 응시했다.

“그럼. 이 세상에는 요정뿐만 아니라 마법사도 있단다.”

순간 잠이 확 달아난 웬디가 고개를 들었다.


“지팡이를 휘두르고 마법을 부리는 그 마법사요?”

메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 옆 나무 서랍을 열었다. 그곳에는 오래된 반짇고리나 표지가 빛바랜 우표책처럼, 메리가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물건들을 모여 있었다. 서랍 안쪽을 뒤적이던 메리는 낡은 상자 틈에서 편지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의 크기는 작았지만, 테두리에 붙은 은박이 전등 불빛을 받아 기묘하게 반짝거렸다. 한가운데 찍힌 꽃 모양 각인은 진짜 꽃을 박제한 건가 싶을 정도로 정교했다. 신기한 건 봉투를 여는 순간, 방 안 가득 숲 냄새와 은은한 재스민 향이 퍼져 나왔다. 봉투 안에는 보라색으로 된 얇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나의 벗에게,

드디어 숲 한가운데 사계절이 머무는 산장을 지었습니다.

당신의 발걸음이 이곳을 향하는 날이 온다면, 차는 늘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당신의 친구, 에드먼드 보냄.]


웬디가 정갈한 필체로 적힌 편지를 눈으로 읽는 사이, 메리가 속삭이듯 말했다.


“이건 엄마가 예전에 만났던 마법사가 선물해 준 초대장이야.”

웬디는 숨을 들이켜며 눈을 크게 떴다. 마법사와 엄마가 친구였다는 이야기는 그 어떤 동화보다 웬디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엄마가 마법사랑 친구였어요?”

메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웬디만큼 어릴 때의 일이지만, 며칠 동안 만난 적이 있단다. 그 마법사는 세계 곳곳에 숨겨진 진귀한 꽃들을 찾아 여행 중이었고, 엄마는 동네에 피는 들꽃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잘 알고 있었거든.”

“마법사가 왜 꽃을 찾아요?”

“언젠가 깊은 숲속에 사계절이 한꺼번에 피는 산장을 짓겠다고 했거든. 꽃잎이 흩날리는 봄과 그늘이 깊어지는 여름, 단풍이 타오르는 가을과 눈이 소복이 쌓이는 겨울이 모두 한곳에 머무는 것처럼 말이야.”

웬디는 사계절이 한곳에 머문다는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마당에 쌓인 눈 위로 잠깐 단풍잎이 쌓인 모습을 상상했지만, 도저히 어울리지 않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 편지는 이제 우리 웬디가 가지고 있으렴.”

메리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웬디의 손바닥 위에 편지를 살포시 올려놓았다. 편지는 분명 종이로 만들어졌을 텐데, 손끝에 닿는 촉감은 어딘가 이상했다. 천처럼 매끄러우면서도 얇은 꽃잎을 겹겹이 쌓아 올린 듯한 폭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건 엄마가 받은 선물이잖아요.”

웬디는 엄마의 소중한 편지를 받아도 되는지 몰라 머뭇거렸다. 메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웬디의 이마를 손끝으로 쓸어냈다.


“엄마는 이제 초대장이 없어도 괜찮아. 그리고 이건 엄마보다 앞으로 웬디에게 더 필요할 거란다.”

메리는 큰 비밀을 알려주듯 아까보다 목소리를 더 낮췄다.


“만약 우리 웬디가 살아가면서 정말 힘든 일이 가득하다고 느껴지면, 이 초대장에 입을 살짝 맞추렴.”

“입을 맞추면 어떻게 돼요?”

메리는 잠시 창밖의 어두운 숲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러면 웬디를 위한 길이 나타날 거야. 네 삶 어딘가에 다정한 쉼표를 찍으러 가는 길.”

“쉼표?”

웬디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직 일곱 살인 웬디에게 ‘삶’이나 ‘쉼표’ 같은 말들은 안개처럼 흐릿한 단어였다. 하지만 메리 또한 딸이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는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초대장을 다시 봉투에 넣었다. 그리곤 웬디의 베개 아래에 보물을 감추듯 깊숙이 밀어 넣었다.


“엄마는 우리 웬디에게 그런 순간이 한 번도 찾아오지 않기를 원해. 하지만 언젠가 너 스스로 필요하다고 느끼는 날이 온다면 고민하지 말고 이 초대장을 꺼내렴.”

엄마의 목소리는 마치 먼 미래를 예언하는 사제처럼 들렸다. 멍하니 있는 딸을 향해 메리는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이건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되는 우리만의 비밀이야. 알겠지?”

“네.”

웬디는 손가락을 걸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늘 자신이 똑똑하다고 으스대는 옆집 토니에게 엄청난 소식을 자랑할 수 없다는 건 아쉬웠지만, 이런 비밀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웬디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잠시 후, 웬디의 눈꺼풀이 다시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창문을 살며시 두드리던 나뭇잎 소리도 어느덧 잦아들어 방 안에는 고요한 정적만이 남았다.


“엄마.”

“응.”

“그 마법사는 지금도 숲에 있을까요?”

졸음기가 물씬 배어 나오는 딸의 물음에, 메리는 몸을 기울여 웬디의 이마에 따뜻한 온기를 남겼다.


“꽃이 피어 있는 한, 그럴 거야. 그럼 잘 자렴, 우리 딸.”

“엄마도요.”

혼자 남겨진 웬디는 신비로운 마법을 부리는 마법사의 모습을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 이내 규칙적인 숨소리가 방 안을 고르게 채웠다. 베개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꽃향기 덕분인지, 웬디는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아주 깊고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 *


‘이건 엄마보다 앞으로 웬디에게 더 필요할 거란다.’

봉투를 건네주던 엄마의 목소리가 웬디의 귓가에 또렷하게 울렸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동화책을 읽어주던 엄마와 갓 너머로 스미던 호박색 전등, 창밖의 나뭇잎이 자장가처럼 스치던 밤. 그때의 일은 웬디에게 있어 어느 때보다 반짝이던 추억이었다.


“살아가면서 정말 힘든 일이 가득하다고 느껴지면, 초대장에 입을 맞추라고 했던가?”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그 말은 여덟 살까지 산타가 존재한다고 믿었을 만큼 순진했던 딸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었으리라. 하지만 봉투를 코끝에 가까이 가져간 웬디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십수 년이 지났음에도, 그날 밤 맡았던 재스민 향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만약 향수를 뿌린 거라면, 잔향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어야 했다. 거기다 손안에서 돌려 본 붉은 각인은 방금 찍어낸 것처럼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잠시 멈칫했던 웬디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봉투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 순간, 봉투가 웬디의 손에서 스르륵 미끄러져 나왔다. 공중에 떠오른 봉투는 스스로 펼쳐졌고, 그 안에 있던 초대장이 수천 조각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수천 조각의 종이들은 공중에서 생생한 꽃잎으로 변해 바닥에 떨어졌다. 잔잔하게 깔린 꽃잎들은 웬디가 있는 식탁에서부터 방을 가로질러 현관까지 꽃길을 이루었다. 이 믿기지 않는 광경에 웬디는 잠깐 숨을 멈췄다. 꽃길 위로 시선을 옮기자, 꽃잎들은 어서 오라고 손짓하듯 위아래로 들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