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1일 목요일
미국에 온 지도 어언 일주일이 지났다. 틈새 라스베이거스 여행도 다녀오고 꽤나 알찬 일주일을 보냈건만 정작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궁금했던 장소는 가보지 못했다. 그 장소는 바로…! 차이나타운 인근에 있는 'St.Mary's square'라는 공원이다. 크지도 않은 공원에 도대체 뭐가 있기에 그토록 가고 싶었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답할 수 있다. 미국 대도시에서는 유일하게 '위안부 기림비'가 설치된 곳이기 때문이다.
친구의 집에서 걸어서 5분 남짓한 거리에 그것도 미국 대도시의 유일한 위안부 기림비가 설치되어 있다니 안 갈 이유가 없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서서, 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10시 남짓한 시간이었다. 평일 아침 10시인데 공원에 사람이 있겠나 싶었지만 수상해 보이는 10대 무리들, 노숙자, 약에 취한 사람,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 아기와 놀고 있는 사람 등등 정말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모두 한 장소에 공존하고 있었던 것마저 참 신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림비는 안쪽에 있다는 표지판을 보고서 수상해 보이는 10대들을 피해 스르륵 들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미국 대도시 유일의 위안부 기림비를 만날 수 있었다.
위안부 기림비는 생각했던 것보다 크고, 정교했다. 기림비는 총 두 개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하신 '김학순 할머니'를 본떠 만든 동상이 무척 인상 깊었다. 손을 맞잡고 서로를 연대하고 있는 소녀들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표정이 정말이지 많은 생각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이날 혼자 앉아 좀 울었다. 저 동상을 하염없이 바라보자니 그냥 문득 '아프다'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느껴졌달까. 기림비 옆의 동판에 새겨진 일본 위안부 관련 글들을 읽으며 분노와 먹먹함 속에 잠시 빠져 있다가, 할머니의 손을 꽉 잡은 후 공원 밖으로 나왔다.
공원에서 나온 후에는 차이나타운을 좀 걷다가, 버스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관광지 중 하나인 'Pier 39'로 향했다. 선착장을 개조해서 만든 종합 쇼핑센터인데, 심지어 가까운 거리에서 바다사자를 볼 수 있다는 점이 나를 몹시 설레게 했다!
꽤나 궂은 날씨에다가 평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군데군데 작은 가판대가 많고, 사람들이 북적북적하니 마치 놀이공원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바다사자를 먼저 볼까, 쇼핑센터를 먼저 둘러볼까 고민하던 중 눈에 띄는 간판이 있었다. 바로 '부댕 베이커리(Boudin Bakery)'였다. 샌프란시스코 여행을 검색하면 무조건 등장하는 맛집인데, 사워도우로 만든 빵 그릇에 고소한 클램차우더(조개 스프)를 넣은 요리가 유명한 곳이다.
금강산도 식후경, 아니 Pier39도 식후경이지. 마침 배도 고팠기에 냅다 안으로 입장해서 클램 차우더를 주문했다. 점원에게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기까지는 약 7초 정도가 걸린 것 같다. 맥도날드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에 맛집에 대한 신뢰도가 조금 떨어졌지만, 부댕 베이커리가 신뢰도를 회복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곳의 클램 차우더는 정말 정말 정말!! 맛있었기 때문이다. 스프 안에는 조개가 가득했고, 부드러운 스프와 새콤한 빵의 조합이 훌륭했다. 쌀쌀한 날씨에 아침 겸 점심으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이었다. 가게 내부는 자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외부에서 먹었는데, 날아드는 비둘기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좋았다.
배를 채우고는 Pier 39의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작은 보트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고, 회전목마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다. 클램 차우더가 위장을 감싼 덕에 마음이 온화해져서 그런지,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관광지에 왔으니 자석이나 좀 사볼까 하여 아기자기한 기념품 가게에 들어갔다. 귀여운 것들이 많았지만 마음에 드는 자석은 없어서 나오려는데, 점원 언니가 나에게 한국인이냐며 말을 걸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하니 그 언니는 자신이 한국의 음악을 너무너무 좋아하며, 특히 가수 김범수의 팬이라고 말했다. 세상에나! 이역만리 타국에서 자기가 김범수의 팬이라는 현지인의 말을 들을 줄이야. 새삼 K-문화의 위대함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 순간이었다.
Pier 39에서 더 이상 할 것이 없는 것 같아서 드디어 마지막 코스인 바다사자를 보러 가기로 했다. 아침에 출근하는 친구에게 바다사자를 보러 가겠다고 하니, 거기 비린내 장난 아니니 조심하라고 했던 것이 기억나서 후각을 한껏 곤두세우며 바다사자의 구역에 입성했다.
바다사자를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 하긴 사람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은 부담스러우니 저렇게 멀리 있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바다사자를 구경하던 중 미니 보트 한 척이 바다사자 쪽으로 다가갔다. 회전목마 근처에서 미니보트 타는 곳을 보았는데, 자본주의의 국가답게 돈을 내면 미니보트를 타고 바다사자 가까이에 갈 수 있는 듯했다. 가까이 가서 조용히 보면 좋으련만, 미니보트는 연신 경적을 울려대며 바다사자를 놀라게 했다. 잠만 자는 바다사자보다는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 바다사자가 더 손님에게 즐거운 경험을 선사한다고 생각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엄연한 동물학대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한국말로 (작게) 그만하라고 소리쳤다(라고 하지만 그냥 조용히 읊조릴 뿐이었다….).
바닷바람을 꽤나 쐬어서 그런지 몸이 급 추워져서 Pier 39를 벗어나기로 했다. 날도 춥고 잠도 오는데 바로 집으로 갈까 고민하다가, 구글 맵을 보니 근처에 '기라델리 익스피어런스(Ghiradelli Experience)'가 있기에 그곳으로 향했다. 기라델리는 미국을 대표하는 초콜릿 브랜드이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대학생 시절에 카페마다 기라델리 초코 소스를 쓰는 것을 보고는 '아! 기라델리가 초콜릿으로 유명한가 보다!'싶었는데 그 본거지를 우연찮게 가게 될 줄이야. 샌프란시스코에 세워진 옛 공장을 개조하여 초콜릿 박물관과 체험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 참. 안 갈 수가 없잖아!
라스베이거스 여행을 하던 중 비행기가 연착되어 기라델리에 잠시 들렀던 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다리도 아프고 힘들기도 해서 매장에 좀 앉아 있을 목적으로 핫퍼지 선데를 사 먹었는데, 정말 정말 맛있어서 거의 눈물을 흘리며 먹었다. 핫퍼지 선데란 말 그대로 초코 퍼지 소스를 따뜻하게 데워 차가운 바닐라 아이스크림 위에 듬뿍 뿌려주는 메뉴이다. 따뜻함과 차가움이 공존하는 천상의 단맛! 그 기억을 안고 다시 방문한 샌프란시스코의 기라델리에서도 당연히 핫퍼지 선데를 주문했다. 바닷바람을 종일 쐬느라 다소 피곤하기도 했는데 피로가 절로 날아가는 달달함에 또 한 번 감동했다. 혼자 먹기에는 꽤나 많은 양의 아이스크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해치우고 나왔다.
기라델리 익스피어런스에는 기라델리 매장뿐만 아니라 서점, 비누 가게, 액세서리 가게 등 각종 가게와 편집샵이 가득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구경했는데 사고 싶은 것들이 정말 많아서 지갑 지키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지독한 환율을 떠올리며 '이건 지금 필요하지 않아.'의 정신으로 마음을 다잡느라 힘들었다.
그중 나의 마음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바로 'F in Exams'라는 책이었다. 각종 시험문제에서 낙제점을 받은 정답을 모아둔 귀여운 책이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정말 주옥같아서 소장 욕구가 가득했지만 한국 돈으로 2만 원 후반대에 달하는 가격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사실 이 책을 사 오지 않은 것은 아직도 후회가 된다.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는 지금, 한국에서 치킨 한번 덜 먹고 이 책을 사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기라델리 익스피어런스까지 구경한 후에는 체력이 다해 집으로 돌아왔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전기장판 위에 몸을 누이고는 전날 포춘 쿠키 가게에서 사 온 과자를 먹었다. 뭉클함과 먹먹함으로 시작해서 편안함으로 마무리한 하루였다.
다음날인 12월 22일은 친구가 쉬는 날이라 함께 카레를 끓여 먹고 느지막이 산책이나 다녀오며 아주 푸욱 쉬었다.
그리고 23일 아침, 우리는 드디어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