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0일 수요일
짧고 굵은 라스베이거스 여행을 마치고 다시 샌프란시스코에 돌아왔다.
친구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침부터 외화를 벌러 나갔다. 집에서 혼자 멍하니 있던 나는 이렇게 하루를 낭비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혼자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돌아다녀보기로 했다. 우선 위험하다고 소문난 아랫동네는 가지 않기로 했다. 최대한 북쪽에서 움직이되, 궁금했던 차이나타운은 꼭 가보기로 결정했다.
일단 아침을 먹어야지! 싶어서 구글 지도에 콕 집어둔 베이글가게로 향했다. 친구의 집에서 걸어서 약 6분 거리에 있는 곳인데, 후기가 상당히 좋아서 궁금했던 곳이었다. 막상 도착하니 생각보다 허름한 가게에 놀랐지만, 앉아서 여유롭게 커피와 베이글을 즐기는 몇몇 사람을 보고는 안심하고 들어갔다. 그래, 후기가 좋은 집이니까 뭔가 감명받을만한 맛이 분명히 있겠지!
사악한 미국의 물가치고는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에 한번 더 놀랐다. 합쳐서 한국 돈으로 만 원 안쪽으로 먹었던 것 같다. (세상에 미국에서 이런 저렴한 집이!) 루이보스 티 한잔과 치즈 바질 베이글에 계란을 추가하여 주문했다. 음식은 거의 마하의 속도로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티는 마시기 좋은 온도라기보다는 거의 끓는 물을 그냥 부어버린… 흡사 용암의 그것과 같은 느낌이었고, 베이글은 이미 조립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전자레인지에 살짝 돌려 손님에게 나가는 듯했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결론은 별로 맛이 없었다는 것이다. 식감으로 따지자면 고무 타이어 같았달까. 구글 지도에 맛집이라고 리뷰를 남긴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역시 싼 게 비지떡이라고 생각하며 창밖을 보던 순간, 상당히 귀여운 장면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바로 귀여운 산타할아버지와 산타할머니! 무슨 행사라도 있는지 노부부가 나란히 산타 옷을 입고 지나가고 있었다. 뜻밖에 마주한 귀여운 풍경에 승천하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고무 같은 베이글을 얼른 먹어치우고는, 밖으로 향했다.
샌프란시스코의 도심을 걸으며 미국은 참 뭐든지 크게 크게 잘 만든다고 생각했다. 사실 샌프란시스코는 예전의 영광을 잃은 지 오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즐비하게 늘어선 거대한 건물들을 보며 확실히 큰 나라는 뭐가 다르긴 다르다고 생각했다. 오후 4시만 되어도 거리에 사람이 없던데, '과연 저 건물주들은 월세는 잘 받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이 머리를 스쳤으나 샌프란시스코에 저 정도 건물이 있을 정도의 사람이라면, 코딱지만 한 한반도, 그리고 그 절반 격인 대한민국에서 월세로 전전하는 내가 걱정할 수준은 전혀 아니라고 판단하여 이내 질문을 거두기로 했다. (참 부럽기도 하지….)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는 건물들 사이를 지나가며, 나도 한 번쯤은 미국에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 나의 월급보다는 한 세 배쯤 되는 돈을 받아야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도대체 그런 직종이 뭐가 있을까? 미국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지 6개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 부분이다.
샌프란시스코 시내 구경을 끝낸 후에는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차이나타운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비교적 치안이 괜찮은 북쪽 동네에 커다랗게 위치하고 있었다. 인천 차이나타운 정도의 크기를 생각했으나 구역마다 줄기차게 적혀 있는 한자 간판을 보며 대륙의 기상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이야. 뭐든지 크게 잘 만드는 건 미국이나 중국이나 비슷하구나.
차이나타운은 동양인으로 가득했다. 물론 중간중간 서양인들도 만날 수 있었으나 거의 99%의 비율은 동양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나와는 인종이 확연히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다가 여기에 오니 묘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차이나타운에서만큼은 내가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어서였으리라. 사람은 또 어찌나 많은지! 아까 산책하며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마주친 사람들을 다 모아도 차이나타운 한 블록의 인구 밀도에는 미치지 못할 듯했다. 각종 특이한 식재료와 과채들로 가득한 상점을 구경하며 또 한 번 여행 속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품목도 쿨하게 한자로 적어 둔 입간판을 보며, LA의 코리아타운은 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언젠가 LA도 제대로 여행해 봐야지.
차이나타운으로 향한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포춘 쿠키'를 사고 싶어서, 둘째는 궁금했던 서점을 가고 싶어서이다. 포춘 쿠키는 연말도 다가오니와 지난번에 만났던 친구의 친구들(오스카 부부와 크리스 부부)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함께 열어보면 좋을 것 같아서 사기로 했다. 때마침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는 포춘쿠키로 유~명한 집이 있다고 했다. 그곳은 바로 '골든 게이트 포춘 쿠키 팩토리'! 구글 후기가 엄청나서 굉장히 기대가 되었다. 아차차. 아까 베이글 사태로 인해 방심은 금물이긴 하네요.
골든게이트 포춘 쿠키는 차이나타운 끝자락의 어느 으슥한 골목에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고소한 과자 냄새가 가득했다. 때마침 직원이 포춘 쿠키를 만들고 있었고, 신기해서 이곳저곳 사진을 찍는 내게 주인아저씨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갓 구운 쿠키 하나를 건네주었다. 입에 넣으니 와작 오독! 고소하고도 짭짤한 맛이 가득하니 좋았다. 선물용 포춘 쿠키 두 봉과 내가 먹을 쿠키 두 봉까지 총 네 봉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매했다. 지금 쓰면서도 입에 침이 고이는 것을 보니 참 맛있긴 했던 것 같다. 참고로 차이나타운 인근에서의 일정이 끝난 후 골든 게이트 포춘 쿠키가 커다랗게 적힌 봉투를 들고 가는데, 뒤에 있던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그거 진짜 맛있어!'라며 말 걸어서 깜짝 놀랐다. 독자들이여! 혹시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실 예정이라면 꼭 한번 들러 보시길 추천합니다.
저녁 어스름이 질 무렵에는 차이나타운에서 벗어나 인근 동네의 서점으로 향했다. 'City Lights'라는 이름의 서점이었는데, 샌프란시스코에서 굉장히 유서 깊은 서점인 듯했다. (왜냐하면 구글 후기에 그렇게 적혀 있었으므로….) 샌프란시스코의 대표 작가인 '진즈버그'가 운영을 했다나 뭐라나. 아무튼 지역에서 유명한 서점이라니 책 사모으기 좋아하는 내가 안 갈 수가 없었다.
서점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행자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고, 지역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너도 나도 자신이 고른 한 권의 책 속에 빠져서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대다수의 서점이 그렇듯 카테고리별로 구역을 나누어 두어 구경하기도 수월하고 책을 고르기도 좋았다. 특히 성소수자를 의미하는 'LGBTQI' 구역이 있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 서점에서는 한 구역을 차지하는 것은 아예 못 본 것 같은데(나의 견문이 좁은 것일 수도!) 떡하니 책장 하나를 앞뒤로 다 채울만한 양의 책이 있다니, 역시 다양성의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 저책 구경하다가 한국계 작가의 서적인 '파칭코'를 샀다. 무려 원문으로 된 책을 사다니! 돌아가면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읽겠다고 산 것이다. 사는 게 바빠 아직 단 한 장도 펼치지 못했지만. 하하하하하하. 그리고 힙한 스타일의 점원 언니의 추천을 받아, 샌프란시스코의 대표 작가인 알렌 진즈버그의 시집도 샀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처럼 진즈버그의 가장 대표적인 시집의 제목이 'Howl'이라 하여 망설임 없이 샀다. 물론 이 시집도 아직까지 단 한 장도 읽지 못했다. 이쯤 되면 그냥 소유욕에 의해 책을 사는 것일 수도 있겠다. 책들아… 미안하다….
포춘 쿠키에 이어 책까지 한아름 산 후에는 집에 들렀다가, 운동을 하기 위해 그리스 신전 헬스장에 갔다. 여느 때와 비슷하게 열심히 수영하고는, 퇴근해서 온 친구와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다. (룸메이트와 같이 살면 왜 점점 배달의 노예가 된다는지 잘 알 수 있는 지점이었다.) 그리고 친구에게 포춘 쿠키를 선물하며 함께 하나씩 뜯어보았는데, 꽤나 마음에 드는 문구들이 나와서 좋았다. 게다가 미국판 로또인 파워볼 번호는 덤으로! 언젠가 미국을 떠나기 전에 꼭 파워볼을 사리라 다짐하며, 친구와 파워볼 당첨 시의 계획을 짜며 잠들었다. 행복 회로를 돌리는 건 누구나 자유이니까요. 호호호.
누군가에겐 일상이었지만 나에게는 특별했던 하루가 또다시 저물었다. 내일은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다음 편을 기대해 주세요. 한줌단 독자님들. 읽어주심에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