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것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한눈에 너를 알아보았다. 어떻게 내가 너를 몰라보겠니.
혜진. 나는 네 이름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 대신 나는,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나요, 고객님,
하고 말했다. 너는 앉으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네 왼쪽 이마에 엄지손톱처럼 둥근 흉터가 보였다.
노원구 동일로. 서울의 변두리. 차가 다니는 길 옆에 있는 전자상점. 그리고 그 가게 안 변두리에 내 자리가 있다. 애꿎은 전자상가에서, 핸드폰을 고쳐달라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내 자리는 공릉동에서 다시 한 번 밀려나는 수밖에 없었다.
자투리의 변두리,
아니, 변두리의 자투리가 맞는 건지도 모른다.
월요일, 그것도 한낮에 이 곳까지 찾아오는 손님은 많지 않다. 그래서 너는 더욱 오롯했다.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너를 보며, 나는 기억의 자투리를 더듬었다. 혜진아, 터져나오려는 이름을 참으며.
야, 걔 이혼했다며.
그래? 걔 딸 있지 않았어?
얘, 자식이 문제니, 걔 허구헌날 맞고 살았다던데.
어이구, 쯧쯔. 그리고, 그리고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 건배사와 잔이 부딪히는 소리.
나는 왜 네가 동창회에 나오지 않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잔을 부딪히며 쓰게 웃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게선 웃음소리가 나지 않았다.
너는 내게 네 핸드폰을 내밀었다. 자꾸 뭐가 뜨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뭐가 고장난건지.
너는 말을 줄였다.
네,
대답을 하며 나는 침을 삼켰다. 고객님이라는 말도 삼켰다. 웬지 그 말을 삼키고 싶었다.
어디 한 번 보겠습니다.
네, 핸드폰 저장 용량이 부족하네요.
지금 뜨는 메시지가 저장 공간 부족이라고 나와있어요. 이렇게 되면.
나는 슬쩍 너를 보았다. 네 눈빛은 슬며시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여전히 나를 알아보지 못한 눈빛이었다. 나는 조금이나마 너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네, 다행히 기기에 고장이 있다거나 한 건 아니구요, 수리비가 따로 들지는 않습니다.
아, 그런가요.
그런가요, 아니다. 그런가요오, 하고 너는 길게 말꼬리를 끌었다. 다시 네가 머리를 넘겼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네 흉터를 다시 마주한다는 것이 죄스러웠다.
원래 클리닝 앱을 깔아서, 그러니까 집안에도 청소를 해야 되는 것처럼 핸드폰도 주기적으로 관리를 해줘야 합니다. 일단 지금은 제가 설정, 여기 톱니바퀴처럼 생긴 것 보이시나요?
네가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 설정에서 수동으로 필요없는 프로그램이랑 자료들 삭제할 수 있어요. 이렇게, 지금. 일단 삭제할 수 있는데, 혹시 이 중에서 지금 사용하지 않는 앱이나 지워도 괜찮다 싶은 파일들 있는지 확인 부탁드릴게요.
너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 거랑 이 거, 그리고,
너는 다시 말을 줄였다.
그러시구나. 그럼 이렇게 파일들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당분간은 그런 메시지 뜨는 일은 없을 거에요.
나는 손가락을 놀렸다. 너는 내 손가락을, 내 손가락이 닿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 나는 너를 보고 있었다. 네 입시울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마치 내가 핸드폰을 고치는, 무슨 의사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나를 보고 있었다.
혹시 너 혜진이 아니니?
묻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네가 반색하며 나를 반길까. 우리는 손을 맞잡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다시 만날 약속을 할까. 내가, 이 내가 네가 입은 상처를 조금이라도 낫울 수 있을까. 아니, 상처를 가리는 데일밴드라도, 될 수 있을까.
아니, 아니다. 네가 이혼을 했다는 사실을 내가 안다는 것이 어떤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너는 당황할지 모른다. 서둘러 핸드폰을 챙겨 달아날지 모른다. 그리고 가지 않는, 가지 않을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어떤 말이 또 떠돌지 걱정할지 모른다.
붕 떠 있던 몸이 다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나는 다시 내 자리로, 서울의 변두리에 있는 가게, 그리고 그 가게의 변두리에 앉았다.
그리고 평소에 쓸데없는 파일은 이렇게 정리하시고.
나는 여전히 떠들고 있었다. 그리고 너는 여전히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가게가 살짝 소란스러웠다. 나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청년이 번호표를 뽑더니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이쪽을 몇 번 흘겨본다. 고객이다. 월요일 오후 한 시에, 고객이라니. 나는 문득 그가 원망스러웠다.
너는 여전히 내 손가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도움이 끝을 보이고 있었다.
조금 가슴이 시큰했고, 또 아려왔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누구에겐지 모를, 고마움이 들었고 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핸드폰 잘 안끄시죠?
네, 그렇네요.
너는 다시 말을 줄였고,
고객님, 일주일에 한 두 번, 아니 세 번이라도 꼭 핸드폰 껐다 키도록 하세요. 그냥 충전만 하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요 핸드폰도 사람처럼 잠을 자야 하는 거랑 똑같은 원리거든요. 가끔 껐다 켜주셔야 이런 불필요한 데이터도 없어지고.
나는 말을 늘이고 있었다. 청년이 이 쪽을 힐긋 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네가 다시 이 곳을 찾기를 바라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네가 이런 기본적인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을,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라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네 스스로 이런 것쯤은 알 수 있도록, 적어도 이런 것만이라도 내가 말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 맞을 것이다.
아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여기까지라는 것이 맞을 것이다.
네, 그럼.
나는 네게 핸드폰을 넘겨 주었다.
너는 손가락으로 몇 번 핸드폰 화면을 두드렸다. 그러더니 곧 얼굴이 환해졌다.
네, 고맙습니다.
너는 고개를 숙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내 눈에 또 다시, 네 이마 왼편의 그 둥근 흉터가 들어왔다. 나도 고개를 숙였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너는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고, 그리고, 돌아섰다. 나는 너의 작은 뒷모습이 가게에 놓인 우람한 가전제품들을 피해 월요일 한낮의 거리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오래전 고등학교 졸업식을 떠올렸다. 나는 네가, 너와 비슷하니 작은 어깨의 네 어머니와 함께 운동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잘가.
그때도 나는 입술을 달싹일 뿐이었다.
행복해라, 라고 했던가. 잘 살아, 라고 했던가. 아쉽게도 기억의 자투리는 그저 뿌옇기만 했다.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달싹이고, 달싹였을 뿐이었다. 그랬을 뿐이다.
네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한 남자, 또는 아무 상처도 남기지 않은 남자. 둘은 같은 것이고 오롯한 나였다. 그래, 이렇게 마무리, 또는 갈무리 하도록 하자.
흠,
이제 내 앞에 마주 앉은 청년이 헛기침을 했다.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다른 게 아니라 액정 교체가 좀.
청년이 주머니를 더듬었다. 그러더니,
어, 엄청 친절하시네요.
청년은 네가 사라진 문가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럼요.
난 답했다.
LG 베스트샵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