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제
빈 사무실에 모니터가 깜박인다. 아니다. 깜박이는 것은, 나다.
일이 있다. 일이 남아 있다, 고 혼자 되뇌어 본다. 알고 있다. 그렇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모니터에서 눈을 돌린다. 오른손 옆에 놓인 핸드폰을 바라본다. 좌판에 놓인 생선처럼, 가만한 액정을 본다.
“왜, 뭐 기다리는 거 있냐?”
네가 이죽거린다. 듣기 싫어,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여전히 손은 움직일 생각이 없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만다.
“청승이야, 청승은. 사내자식이.”
네 혼잣말을 속으로 삭인다. 대꾸할 말도, 힘도 없다.
모든 소설은 과거에 일어난 허구의 사건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모든 소설은 과거 시제로 쓰여야 한다, 던 명제가 떠오른다. 누구의 말이었던가. 어떤 작가, 아니, 어떤 교수의 말이었던가.
그러나 과거가 되지 않는 사건도 있다.
지금 내 옆에서 히죽거리고 있는 너처럼.
헤어졌다. 그녀와 헤어졌다, 고 혼자 되뇌어 본다. 알고 있다. ‘어지다’라는 말은, 남의 힘에 의하여 앞말이 뜻하는 행동을 입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와 헤어졌다. 새벽 두 시였고, 그녀는 그날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 하였고, 우리는 잠깐 통화를 했었고, 수화기 너머에서 떠들썩한 소리와 함께 오토바이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지금 골목에서 전화를 받고 있나보다, 하고 나는 생각을 했고, 일이 있고, 일이 남아 있었고, 그날도 빈 사무실이었고, 나는 철야 때마다 가는, 갈 수밖에 없는, 낡은 찜질방에서 눈을 붙이기 위해, 사무실에서 나와 길을 건너는데, 핸드폰이 울렸고…….
그녀와 헤어졌다.
그녀는, 이제 그만 만나자고 했다. 나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녀 자신은 안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했다.
그녀의 말은 1년 마다 계약을 갱신해야하는 근로자, 따위는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을 했고, 생각을 해보자는 말 밖에 할 수 없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아니, 그 때에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생각이라는 것은, 아무리 해도, 전혀 쓸 데 없는 것이고, 결국 그녀는 또 다시,
미안하다고 했다.
그녀의 말은 1년 동안 생각을 한다 해도,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알겠다고 했다. 하루만의 대답이었다. 알겠다는 말보다는, 차라리,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럴 줄, 몰랐냐는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내 속 한 구석에서 치고 올라왔다.
“차라리 좀 자는 게 어때?”
네가 말한다. 모니터의 화면은 바뀐 것 하나 없는 그대로다. 그렇겠지. 변한 것이 없다. 핸드폰은 여전히 가만하다. 저절로 엑셀의 빈칸에 숫자들이 채워지고, 보고서의 결론이 나오는 일은, 없다. 그러니 그녀가 다시 돌아오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그녀라면 그런 사람이니까.
내가 아는 그녀. 내가 알던 그녀. 내가 알던 그녀라고? 네가 뭘 알았기에?
머리가 띵하다. 다행히, 네가 던진 질문은 아니다. 내 혼잣말, 이었구나. 나는 고개를 숙인다. 내가 알던 그녀. 너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발끝으로 바퀴가 달린 의자를 끈다. 다시 한 번 모니터를 본다. 바뀌는 것도, 바뀔 것도 없다.
그래, 자자. 자고 일어나자. 그게 낫겠어.
자리에서 일어난다. ‘차라리’라는 말을 목 안으로 삼킨 채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긴다.
매개체
출근길. 하늘이 맑다. 서글프게 푸르다.
날숨에 한숨이 어린다. 주변을 살핀다. 혹시 네가 있었다면, 또 비웃음을 샀겠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다리가 놓인다. 징검다리처럼, 점점이 다리가 놓인다. 다리가 향하는 곳은 하나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는 것처럼, 모든 사물들이, 점점이, 점점이, 그녀에게로 향한다. 나는 고통스레 그 점, 과 점, 을 밟고 건너가 그녀를, 생각한다. 파란 하늘에 머리를 담근 나무들.
점.
서래마을 몽마르트 공원. 거짓말 같이 작은 공원. 일상에서 오려낸 듯, 사람들은 저마다 목줄을 찬 개와 함께 공원을 걷는다. 나는 그녀의 무릎을 베고 벤치에 누워있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눈을 감는다. 눈을 감아도 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떠간다.
또 점.
대부도 갯벌. 따가울 만큼 쨍쨍한 햇볕. 그 아래 뻗은 갯벌. 우리는 개구쟁이처럼 발을 뻗고, 빠지고, 게나 작은 고둥이나, 소라 같은 것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펜션에서 가져온 파란 양동이에 보잘 것 없는 것들을 잡아넣었다가 다시 놓아준다. 개흙이 묻은 장화를 신은 채 뚝방을 걷는다. 눈앞에도 하늘. 파란 하늘,
을 밟고 마침내 나는 그녀를 떠올리고 만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점, 과 점도 필요없다. 짧은 방정식처럼 곧바로 그녀를 떠올릴 수도 있다. 왜? 그녀는, 아, 그녀는 파란 하늘을 좋아했으니까.
“실없기는.”
왔구나. 네가 말을 붙인다.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네가 찾아오는 것을 이제는 익숙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고개를 숙인다. 보도블럭이 보이고, 내 발이 보인다. 나는 또 어느새 그녀와 함께 걷는 걸음을 생각하고 만다.
“보도블럭에서까지 떠올리는 건 대단한데. 인정.”
네 목소리가 생각을 끊는다.
“참, 이런 거 보면 이별이 사랑보다 강한지도 몰라. 인정하냐?”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 그러나 속으로는, 네 말이 맞는지도 몰라, 어설피 인정한다. 이별보다 강한 사랑, 아니, 사랑보다 강한 이별. 이별 후 그녀를 떠오르게 하는 것들도 그녀를 떠올리는 빈도도 늘었다. 흡사 질병 같다, 고 생각한다. 모든 조직에 옮아들어가는 세균처럼, 그녀는 나의 세계를 물들이고 있다.
한 번은 퇴근길에 빵집을 보고 걸음을 멈춘 적이 있다.
빵을 사가곤 했었다. 그녀는 그 빵집의 얼그레이 밀크티 잼을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그 잼을, 오래된 갱지 색의 잼을 가끔 사곤 했다. 그녀가 잼을 발라먹을 식빵도 같이 사곤 했다.
얼그레이 밀크티 잼, 이라는 것이 있다. 나는, 빵에 잼을 발라 먹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그런 것이, 그런 어설프고도 길고 복잡한 이름의 물건이 있고, 그러한 것을 빵에 발라먹고, 또 그러한 것을 사 먹는다는 것을, 생각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또다시 그 것을 다시는 살 일이 없는데, 문득 그 것이, 거리를 걷는 나를 세게 후려친 것이다.
다른 여자와 선을 보다가도, 마찬가지였다. 우습게도, 그것은 식당에서의 일이었다.
아라비아따.
라고 메뉴판에 적힌 글자였다.
아라비아따.
라는 글자에 문득 실웃음이 돋았다. 아라비아따라니, 얼마나 우스운 이름인가, 나는 생각했다.
그러고 난 뒤에 실없는 자식, 하고 나는 자조했다. 실없는 자식. 그녀와 있을 때 나는 실없는 자식이었다. 나는 실없이 웃기를 잘했고, 그래서 그녀도 실없이 웃곤 했다.
그런 생각이 들고 나니 글자 옆의 있는 작은 고추의 그림도 우습게 느껴졌다. 그리고 낯선 여자와, 앉아 웃음이 섞인 말을 주고받으며, 아라비아따 따위의 이름을 가진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갑자기 간지러울 만큼 낯설게 느껴졌다.
그게 전부였다. 그 후로 나는 앞에 앉은 여자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고, 그 만남은 그것이, 전부였다.
더 좋은 사람 만나.
라는 것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낯선 역에서, 낯선 여자를 만나, 낯선 이름의 스파게티를 먹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아니, 될 턱이 없지.
“될 턱이 있나.”
네가 옆에서 웃는다.
침을 눌러 삼킨다. 묵묵히 걷는다. 생각을 하지 않기로 한다. 습관처럼 무단횡단을 하는 건널목을 지나 아파트 단지 사이를 걷는다. 개미들이 더듬이를 더듬어가며 굴을 나서듯 본능처럼 걷는다. 개찰구를 지나 승강장에 선다. 여기까진, 훌륭하다. 오늘은 더 이상 너를 보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흐릿하게 지나간다. 스크린도어에 비친 어설픈 것을 본다. 지하철이 들어선다는 알림 소리가 나온다. 승객들이 앞뒤로 선다.
뒤를 돌아본다. 들숨 한 가닥이 코를 지나 머리의 어느 한구석을 깨운다.
아, 또, 점, 이구나.
“불렀어?”
네가 옆에서 히죽 웃는다. 그러나 나는 대꾸도 하지 못한다. 머리가, 온 몸이 알고 있다. 그녀에게서 맡던 냄새, 다. 아마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저 여자겠지.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무언가 하려 한다, 어설프게나마 생각을 쫓으려 한다. 다시 들숨 한 가닥이 코를 지나고,
눈은 옆에 어딘가에 있을 그녀를 찾는다, 찾으면서, 알고 있다, 그녀일리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지금 이 곳에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향수인지 샴푸에서 비롯한 것인지 모를 그 향은 내가 그녀와 같이 지내던 3년 동안 바뀐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다.
누군가 툭 팔을 친다. 나를 스쳐 차에 들어가는 사람을 본다. 스크린 도어가 닫힌다.
전철이 떠난다. 전철에 타는 것을 나는 실패하고 만다. 전철의 빛이 첨처럼 작아지고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계단으로 떠난다. 빈 승강장에는 나와 너만이 우두커니 서 있다.
객관적 상관물
너는 선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질구질한 늙다리 선생. 점심시간 직후의 수업처럼. 지루하고, 배울 것도 없지만, 피할 수 없고, 배울 수밖에 없는. 노려보고 노려보며, 끝나기를 바라지만, 끝나려면 아직도 분침이 한참을 움직여야 하는 그런 수업이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항상 약속되어있는 수업이다. 사실 이미 몇 번을 겪고 난 수업이다. 너를 미워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다만 유독 이 번 수업을 길게 끄는 네가 미운 것은 사실이다.
“뭐 보냐?”
어김없는 네 참견에 나는 더 이상 답하지 않는다.
핸드폰 액정 화면에 얹혀 있던 손가락을 치운다. 그녀의 프로필, 사진이다. 작은 죄를 저지르는 마음과, 아이의 실수를 내버려두는 마음과, 미안함과, 슬픔과, 서러움과, 약간의 억울함과, 그리움이 섞인다. 나는 믹스 커피가 따뜻한 물에 풀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는 마음으로 그것들이 섞이고 피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내가 지우라고 했잖아. 하긴 모르지. 지운다고 생각이 나지 않는 게 아니니까. 뭐 끌어안고 궁상을 떠는 것도 네 자유긴 한데.”
오늘따라 네 주절거림이 심하다. 나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다. 핸드폰을 애써 손으로 가린다. 그러나 네게로부터 감출 수는 없다. 너는 쿡쿡 웃는다. 웃음소리가 따끔하다. 너는 오늘따라 유달리 신난 모양이다.
“남김 메시지가 바뀌었네. 한 번 읽어 봐.”
새로 바뀐 그녀의 남김 메시지, 촛불 맨드라미.
촛불 맨드라미, 라는 단어를 입술 밖으로 내고 만다. 혀끝이 이빨의 뒤를 스치듯 낳았다가 힘없이 떨어지고, 입술이 슬적 맞부딪치다 언제 그랬냐는 듯, 벌어진다. 다시 닿았다가, 떨어졌다가, 다시 닿았다 떨어진 입술은 벌어진 채로 멎는다. 혀는 이빨 뒤에 어설프게 숨어 있다.
촛불 맨드라미.
“궁금하지? 궁금해 미칠 것 같지?”
손가락이 관자놀이에 얹힌다. 머리가 지끈하다. 나도 알고 있다. 찾아보면 지는 것이다. 진다. 누구에게 지는 거지? 당연히 지금 내 옆에서 깐족거리고 있는, 이 녀석에게 지는 거지.
“찾아 봐, 물론 찾아볼 수밖에 없겠지만.”
검색을 누르고 만다.
꽃이다. 빨간 꽃. 손가락처럼 길쭉하게 생긴 빨간 꽃이다. 촛불보다 여우의 꼬리 같이 보이기도 한다.
촛불 맨드라미. 이명은 횃불 맨드라미, 또는 불꽃 맨드라미. 개맨드라미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개량된 원예품종으로 원산지는 아열대 지방이다. 내열성이 좋아 더위에 잘 견디며 물 빠짐이 좋은 흙에서 기르는 것이 좋다. 크기가 작아 화단이나 화분에서도 쉽게 기를 수 있는 꽃이다.
꽃말은 시들지 않는 사랑.
시들지 않는 사랑, 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읽는다. 입술은 한 번을 닿지 않는다. 어설프게 벌어진 입에서 혀가 천천히 마르고 식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남김 메시지는 촛불 맨드라미야. 시들지 않는 사랑이 아니라.”
네가 한 마디를 거든다. 알아. 알고 있어.
“하나 더 재미있는 것이 있는데.”
너는 이죽거림을 멈추지 않는다.
“저건 네가 보낸 꽃이야.”
숨이 멎는다. 잊고 있던 것이 떠오른다. 그녀에게 보낸 꽃다발이 있다. 헤어지기 전에 미리 잔금을 치른 것이다.
손톱에 멋들어지게 메니큐어를 칠한 손가락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꽃을 다듬고, 가위로 이리저리 자르고, 모양을 내고, 꽃다발을 만든다. 누군가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주소와 이름을 확인하고 경비실에 꽃다발을 맡긴다. 날이 저물고 방으로 올라가기 전, 그녀가 경비실에서 택배를 확인한다. 꽃다발이, 있고, 그 꽃다발 안에 촛불 맨드라미가 있다.
나는 배송조회를 하는 심정으로 내가 보지도 못한 꽃다발을 더듬어 본다. 다시 핸드폰의 화면을 본다. 화면에 가득한 꽃의 사진. 꽃의 이름. 촛불 맨드라미. 문득 나는 이 꽃의 이름을, ‘촛불 맨드라미’라는 이 꽃을, 비름과 맨드라미속의 이 식물을 잊지 못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보고 싶은 것을 보지 말고, 읽고 싶은 것을 읽지 말고.”
네가 노래하듯 말한다. 맞는 말이다. 촛불 맨드라미를 보면 촛불 맨드라미를 보고, 촛불 맨드라미를 읽었으면 촛불 맨드라미를 읽어야 한다.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 당연한 것을 생각 끝에 알게 된다. 그녀가 적은 촛불 맨드라미가 촛불 맨드라미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나는 생각하고, 나를 설득해야 한다.
시인은 시에 여러 가지 사물들을 뚝 뚝 떨어뜨려 놓는다. 그 사물들은 누구의 감정과도 관계없다. 그러나 그 사물들이 특별한 정서의 단서가 된다. 시인과 독자는 무심히 떨어진 사물들을 딛고 정해진 감정으로 향한다. 사물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공연히 밑줄을 긋고, 숨겨진 상징과 비유를 생각하고, 망상에 빠지는 것은 사물이 아니다.
나는 촛불 맨드라미, 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입 밖으로 내어 본다.
화면에는 작은 손가락같이 생긴 붉은 꽃이 무수히 피어 있다. 나는 꽃다발, 그녀, 시들지 않는 사랑, 따위 툭툭 터져 나오는 말들이 잦아들 때까지, 그 꽃의 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데칼코마니
어두운 조명. 미로 같은 복도. 유리가 짙게 코팅된 미닫이문을 연다.
왔냐.
어, 남자 둘이 뭐 이런 데를 오냐.
답하며 자리에 앉는다.
안주는?
이미 시켰지.
술은?
H는 이미 테이블에 놓인 소주병을 가리킨다. 나는 병을 들어, 어쩐지 머쓱한 기분으로 한 번 흔들고, 뚜껑을 딴 뒤 술을 따른다. 소주를 따라놓고 안주를 기다린다. 시답잖은 말을 몇 마디 주고받는다.
괜찮냐.
응. 뭐. 그냥. 너는 좀 어떠냐.
나도, 응, 뭐, 그냥.
이라고 말하고 웃고 만다. 말이 끊기려는 참에 종업원이 문을 연다. 반질반질한 테이블 위에 안주가 놓인다. 국물 안주 하나, 매운 안주 하나, 그리고 두부김치. 이 세 안주의 조합은 우리가 안주를 고를 때 항상 지키는 그야말로 법률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또 한 번 피식 웃고 만다.
가을이 이별의 계절인가 봐.
그러게,
하고 동의하지만 나는 속으로 그녀와 나의 첫 만남은 가을에 있었음을 생각한다. 아니, 잠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을 때도 가을이었던가. 저번에 헤어졌을 때는, 봄이었던가. 이번에는 가을이고. 그럼 내게 가을은 만남의 계절인 걸까, 이별의 계절인 걸까. 쓸데없는 생각 말라는 듯 H가 술잔을 부딪쳐 온다.
첫잔을 마시기 무섭게, H와 나 사이에 네가 자리한다.
“둘이 궁상맞게 뭐하는 거야.”
네가 우리 사이에 앉는 것이 당연한 것은 물론이요, 반갑기까지 하다. 술이, 좋긴, 한가 보다, 하고 생각한다.
안 힘드냐? 넌 뭐 한 달 쯤 지났나?
난 고개를 끄덕인다.
“뭐 인마, 뭐가 안 힘들어. 오늘도…….”
네가 주절댄다. 맞는 말이다. 고개를 젓는다.
힘들지. 똑같더라. 뭐, 이제 한 달인데. 그래도 좀 낫지 않으려나.
그러냐, 난, 난 차라리 네가 부럽다. 난 이제.
H가 말을 멈춘다,. 잠깐 허공에 시선이 머물다가 내려간다. H의 소주잔이 비었다. 나는 소주를 따른다.
넌 왜 헤어졌냐.
H가 묻는다. 말이 막힌다. 모르는 것은 아냐, 네가 입을 열려는 것을 눈짓으로 막는다. 알고 있다. 분명 알고 있는 것이 말로 잘 나오지 않는다. 머리를 쥐어짠다. 더듬, 으며 말한다. 그녀가 나를 떠난 이유. 문득,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상하게도 너는 말이 없다. 충분히 비아냥거리며 말을 자를 수 있었을 텐데. 너는 묵묵히 내 쪽을 바라볼 뿐이다. 아, 소주잔이 비었다. H가 뒤늦게 알아채고 술을 따른다.
H도 더듬, 으며 헤어진 이유를 말한다. H가 헤어진 이유에는, H의 추측과 해석이 조금 섞여있다는 생각이 든다.
헤어지니까, 진짜 별 게 다 힘들더라. 길을 걷다가도 문득. 밥을 먹다가도 문득. 진짜 별의 별 것들이. 한 번은 길가다 그냥 꽃집이 보여서 눈으로 훑는데,. 거기 촛불 맨드라미가 있는거야. 응? 촛불 맨드라미? 그게 뭐냐면. 야, 됐다. 몰라도 돼, 인마. 무튼, 그렇더라.
나도 뭔지 알겠는 게, 네가 아까 카톡으로 ㅇㄷ하고 보냈잖아. 어디냐고. 그런데, 그게 그녀랑 나랑 서로 어디냐고 물을 때 그렇게 말했거든. 한번도, 진짜 한번도 어디냐고 제대로 쓴 적이 없었어. 네가 아까 ㅇㄷ하는데, 그게. 가슴이 무너지더라.
망치로 나무판자를 내리치면, 내리치면 처음에는 부스러기가 튀고, 그러다가 금이 가고, 갑자기 우지끈 부서지는 것처럼. 하루에 몇 번씩이야. 하루에 몇 번씩 그래. 정말 망치가 부서지는 것처럼. 무얼 보다가도. 무얼 먹다가도. 누구랑 밥을 먹다가도. 전화를 하다가도. 갑자기. 망치가 부서지는 것처럼.
사람을 사람으로 지운다는 게 다 헛소리야. 그게, 걔를 지우는 게 아니잖아. 걔랑 같이 보낸 시간을 지우는 건데. 취업을 하고 너는 군대 제대하고 뭐 그런 것들이 이제 앞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거잖아.
맞아. 뭐 그렇게 되지도 않더라.
그게 말이 되냐. 야, 생각해보니까. 내가 걔랑 같이 있었던 게, 취업 준비할 때, 나 국민은행 떨어졌을 때, 그때 진짜 붙는 줄 알았어. 그런데 학교에서 확인하고 나니까. 내가 맨 처음에 엄마한테 전화했거든. 그리고, 그리고 걔한테 전화하는데 갑자기 또 눈물이 나는 거야. 그때 걔가 상록수에서 과외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그거 그만두고 그날 회기까지 왔었어. 하루 종일 같이 있어줬는데. 그런데. 지금. 이제 걔가 취업 준비하는데. 나는. 이제 나는 그러지를 못하는 거야.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걔는 상록수에서 회기까지 왔는데. 상록수에서 회기면, 끝과 끝인 건데.
상록수에서 회기면, 끝과 끝이지.
끝과 끝. 나는 입술을 달싹인다. H가 잔을 든다. 잔이 부딪힌다.
“끝과 끝이네,”
네가 말한다. 나는 웃는다.
수미상관구조
작은 방. 나는 너와 마주 않는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말이다, 나는 맥주를 홀짝, 들이킨다.
“굶는다 뭐다 염병을 하니까 그러지. 이제 서른 다 돼서 굶고 그러니까 바로 면역력 떨어지고, 손발에 습진 올라오고, 병원 가는 거야. 병원 가니까 뭐라디.”
면역력 떨어졌다고, 술 먹지 말라고.
“그래도 이제 좀 괜찮아지니까 바로 술이 당기나봐.”
그러더라.
“하긴 개가 똥을 끊지.”
혀를 차며, 네가 맥주를 홀짝, 들이킨다. 맥주캔을 찰랑, 한 번 흔들고 바닥에 놓는다.
이별은 언제 끝나는 걸까?
“글세. 이별이 끝나는 거. 근데 뭐 별 거 있나.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지. 그녀를 만나기 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먹고. 그녀를 떠올릴 때나 지나가다 보는 좌판대의 고등어를 볼 때나 똑같은 마음이다 싶을 /때, 그 때 이별이 끝난 거지. 아, 그냥 그런 일이 있었지, 싶을 때. 그때겠지.”
홀짝, 그리고 찰랑.
“그녀가 너를 떠나갔다는 것이 슬프지도 않고 화가 나지도 않고 억울하지도 않을 때. 네가 지금 머리로 생각하고 그리고 난 뒤에 아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도 알게 될 때. 무뎌질 때.”
그 기준이 뭘까.
“글쎄. 그녀를 쌍년이라고 말하고도 무덤덤할 때?”
그게 기준이냐. 웃음이 난다. 그리고 잠깐 침묵. 그러다가,
그때가, 올까?
"모르지."
네가 다시 맥주를 들더니, 한 바퀴, 흔들어 보인다. 찰랑.
"꼭 그렇게 되는 것도,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냐."
다시 침묵. 그러다 문득, 궁금하다.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묻고 만다. 내 항복이나 다름없는 물음에, 너는 씩 웃는다.
“힘든 거야. 언제 해도. 여러 번해도. 때마다 다르지. 그 예전에 배운 거 있잖아. 제망매가인가. 그 스님이 동생 죽어서 노래 부른거. 향가, 그게. 거기서도 그러잖아. 미타찰에서 만날 나, 기다리겠노라, 그런거야. 아무리 스님일지라도, 누구나 다 죽어 먼지가 된다는 것을 안다해도, 슬픈 거야. 슬픔은 이기는 게 아니라 그냥, 멎을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더 이상 슬프지 않을 때까지.”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거지.
“응.”
너를 없앨 수도 없는 것이고.
“그렇지. 나는 네가 끝내고 싶을 때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너와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고.
"그렇지. 이기는 게 아냐. 네가 지금 해야하는 것은."
기다리는 것, 뿐이지. 지금, 현재, 진행의 문장들이 과거로 바뀔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지.
네가 고개를 끄덕인다. 맥주를 마저 마신다. 더 이상 흔들어도 찰랑, 소리가 나지 않는다.
재망매가, 오랜만이네. 그게, 어떻게, 첫 줄이 시작했지?
“모르지.”
왜?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알 수 없지.”.
왜?
“나는 지금의 너니까.”
그렇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맥주가 남았다. 남은 것을 마저 홀짝거리고, 정리를 마치고, 침대에 눕는다. 잠이 오지 않는다. 눈이 천천히 어둠에 익는다. 어둠 속에서 천장과 책장의 끄트머리가 구분이 될 만큼 시간이 지난다. 잠이 오겠지.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러겠지. 잠이 드는 것처럼, 눈꺼풀이 감기고, 생각이 멎는 것처럼, 희미해지겠지. 무뎌지겠지.
눈을 감는다. 나는 가만히 생각한다.
또렷한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빈 사무실, 빈 거리. 주머니. 핸드폰의 울림. 이제 우리 그만 만나자.
처음으로 노래방에 혼자 가 노래를 불렀다. 목이 꺽꺽 메도록, 노래를, 소리를 질러 보았다. 알지도 못하던 가수의 노래를, 몇 시간 동안 반복해서 듣고. 걷다 멈추고. 걷다가 다시 멈추고.
어느 순간 마주하고, 마주하고 다시 마주하게 되는 그녀. 퇴근길의 빵집. 보도블럭. 어느 아파트 단지 화단에 늘어선 해바라기. 어느 꽃집에서 내어놓은 꽃다발. 붉은 꽃. 그래, 촛불 맨드라미. 지하철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향기. 지나가는 고양이. 고양이를 유독 무서워하던 그녀. 이상한 이름의 파스타. 기억나니. 첫 만남에서 우리도 파스타를 먹었었다. 그녀가 먹던 파스타. 내 앞에 놓여 있던 하얀 색의 파스타.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카페. 방금 본 영화를 이야기하고. 영화. 나는 종종 엉뚱한 영화를 예매하거나, 또는 엉뚱한 영화관의 영화를 예매해서, 우리는 엉뚱한 헛걸음을 하고. 그런데도 그녀는 한 번 화를 낸 일이 없었고. 갑자기 그 날의 내 어리석음을 나는 넘어가지 않는 음식을 씹듯 연하여, 연하여 곱씹다가.
어설프게 웃기도 한다. 세 번째의 만남. 선배들은 숙맥인 내게 이상한 것을 알려주었다. 세 번째 만남에서, 왜 교차로나 횡단보도 앞처럼, 어설프게 여자와 손이 나란하게 될 때 있잖냐, 그때 여자에게 손을 내밀어 봐, 그때 여자가 손을 잡으면 너한테도 호감이 있는 거야. 건널목 횡단보도 앞, 넌지시 손을 내밀었을 때. 그녀는 내 손을 찰싹 치고, 씩 웃고는, 훌쩍 횡단보도를 건넜다. 나는 그녀를 따라가면서 알 수 없다고 생각했고, 정말 알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때 나는 웃고 있었다.
첫 만남의 그녀를 떠올린다. 낯선 역 앞에서 만남. 그녀는 조금 늦는다고 말했고. 사실 그녀의 얼굴을 잘 알지 못하는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모두 훑고, 모든 사람이 그녀였다가, 그녀일 것이었다가, 그녀가 아니게 되어 다시 지나갔다. 나는 다시 딴청을 피우고 늘어지게 기지개를 한 번 펴보기도 하는데,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고개를 돌아보았다.
그녀였다. 첫눈에 알 수 있었다. 도저히 다른 사람일 수 없었다. 분명한 그녀였다. 그녀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파란 하늘색의 원피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