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by 엽서시

-1-

“전쟁은 끝났어.”

나강총을 든다. 쏘련의동자들이 만든 총은 길고 단단하다. 뼈 같다. 나는 다리뼈를 떠올린다. 나는 훈련받은 대로 개머리판으로 어깨를 짓누른다. 누군가의 다리뼈가 나를 밟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끝났다고.“

나는 놈을 신경 쓰지 않는다. 대신 옷자락으로 총을 닦는다. 손질을 한지 까마득하다. 뻑뻑하긴 하지만 아직 고장이 없는 것이 미쁠 뿐이다. 단단하고, 그리고 단순한 총이다.

“끝났다고, 이 병신 빨갱이 새끼야.”

쏘련의 로동자들이 이 것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하루종일 총을 만들고 단단하고 단순한 다리로 서로의 집으로 바삐 걸어갔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어쩌면 그들의 다리뼈나 다름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쏘련의동자를 생각할 것도 없이, 어쩌면 이 것은 내 다리뼈인지도 모른다. 나는 슬몃 내 다리를 바라본다.

비에 젖은 다리는 총만큼이나 묵직하다.

“내 말 들려?”

놈이 지껄인다. 비가 억수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무섭다. 빗물이 잎을 마구 짓씹고 때린다. 놈은 계곡에 갇혀있다. 첫 발에 놈을 쏘아 맞추지 못한 탓이다. 반나절이 넘도록 놈은 여전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 그리고 나도 여전히 겨눔쇠에 눈을 박고 있다. 나는 놈이 숨어 있는 바위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따궁.

메아리는 금세 잦아든다. 빗방울이 젖은 메아리를 집어삼킨다. 놈이 잠깐 잠잠해진다. 나는 눈을 겨눔쇠에 둔 채 손을 더듬어 싹꾸를 찾는다. 더듬지 않아도 알고 있다. 총알은 여든네 발이 남았다. 폐쇄철을 당긴다. 총이 총탄깍지를 뱉는다.

놈도, 나도 낙오병이다.

구원병은 없다.

“전쟁은 끝났다니까, 씨발!”

아군은 대대본부가 마지막으로 무선을 남겼던 철령산 203고지로 향했다. 아직도 그곳에 대대본부가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상관없다. 어쨌거나 아군은 북쪽으로 걸어야했다. 나는 남겠다고 했다. 나는 동굴에 남아있는 부상당한 동지들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남아야 했다.

눈에 띄게 해쓱해진 정치장교가 내 손을 잡았다. 왼손이었다. 그의 오른손은 수류탄에 파편에 맞아 손가락이 세 개가 넘게 날아간 채, 붕대 아래서 썩고 있었다.

나는 그의 왼손을 맞쥐었다. 차가웠다. 내 손과 그의 차가운 손 사이에 무언가 단단한 것이 있었다. 성냥과 담배였다. 미제의 삐라로 만 담배였다.

이게 마지막은 아닐 것이오.

일본에서 대학을 나왔고 쏘련에서 사상교육을 받았고 친히 김일성 대장에게 만년필을 수여받았다던 정치장교의 얼굴은 나의 얼굴과 다를 바 없었다. 눈은 흔들리지 않았고 대신 어떠한 빛도 없었다. 눈은 오로지 무언가를 보기만 하는 제 본분에만 충실했다.

“디 끝났어. 오늘 협상했다고.”

민의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쏘,

고 정치장교는 외쳤다. 우리는 남쪽으로, 남쪽으로 진군했다. 풀색 옷을 입은 국군은 안중에도 없었다. 직접 교전한 적은 없지만 미군 포로도 보았다. 둥글고 푸른 눈에는 물기와 겁이 어려 있었다. 마치 줄에 메여있는 소의 눈과 같았다.

적은 한 줌 뿐이오. 낙동강에 스스로 고립을 자처한 리승만 괴뢰 정부는 이제 자멸을 눈앞에 두고 있소. 이제 우리민군은 매서운 바람처럼 저들을 남해 바다로 몰아붙여 한 줌 남은 적들도 매서운 파도로 쓸어 넣어야 할 것이오. 그러나민의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쏘.

왜냐면 그 다음에는-.

“아침에 싸인을 마쳤다고 했다. 그러니까 오늘 오후부터 휴전이라고 했어. 휴전, 휴전이라고,.”

너럭바우 뒤의 국군은, 그러니까, 적은,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비가 잦아들고 있다. 나는 또 다리뼈 생각을 한다. 그리고 총에 맞은 오른쪽 다리를 생각한다. 그리고 나를 쏜 국군을 생각한다. 나는 나를 쏜 국군을 알지 못한다. 아마 나를 쏜 그 국군은 자신이 나를 맞추었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다.

카빈총에 맞은 것이 다행이야, 최명로 동지가 말했다. 최명로 상사. 그는 팔로군 출신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는 가끔씩 우리가 알지 못하는 노래를 불렀다. 누구는 그 노래가 중국 노래라고 했고 쏘련 인터내셔널가라고도 했다.

에무원에 맞았으면 다리가 아예 날아갔을 걸세. 그랬다면.

그랬다면?

그랬다면 자넨 끝장났을 게라구.

“끝났다. 이제 싸울 필요 없어.”

인민의 싸움은 끝나지 않쏘!

정치 장교의 외침이 있을 때마다 최명로 동지는 옳쏘를 외쳤다. 옳쏘, 옳쏘! 그는 팔로군에서 덕국에서 만든 마우제 소총을 들었고 이제는 쏘련에서 만든 나강총을 들었다. 그는 누가 만든 총이건 개의치 않았다. 허리야. 겨눔쇠에 놈들의 허리를 올려넣고 방아쇠를 딱.

따궁.

“전쟁은 끝났어.”

팔로군에서 싸웠다고 뙤놈들이 쌀 한 되 더 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싸웠쏘. 왠지 아나. 사람은 싸우지 않으면 죽는 법이라구. 그렇지 않으면 병신 같이, 머저리 같이 그냥 뒈질 뿐이야.자들은,자들은 오소리를 아오? 가진 게 쓸개밖에 없는 오소리도 싸우는 법이야. 굴에 손을 집어넣으면 손등이 짓뭉개지도록 할퀴는 법이거든. 그런데 사람이 싸우질 못하면 오소리만두 못한 게 아니오. 나의, 나의 아버지가 그리하였오. 나의 어메도 그랬어. 그러나 나는 다르오. 동지들도 다르지 않쏘? 그러니 우리는 싸울 것이오.

옳쏘!

정치장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쏘! 최 동지의 저 정신이 바로 인민 해방의 정신이오. 김일성 장군의 정신이며, 쓰딸린 원수와 마오쩌둥 주석의 정신이오. 그분들의 정신이 인민 최하부에서도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오. 당신의 정신이 우리 인민의 정신이며 인민군의 정신이오.

“라디오도 없냐, 빨갱이 새끼야.”

우리가 삼팔선을 넘고 처음으로 적을 본 날짜는 유월 이십칠일이었다. 나는 그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국군은 우리를 볼 때마다 달아났다. 우리는 달아나는 국군의 쑥 빛 등허리에 총을 쏘았다.

나는 그 때도 나강총을 들었다. 어깨에 나강총의 개머리판을 누르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폐쇄철을 당기면 총이 총탄깍지를 뱉고 다음 총알이 올라온다. 다시 어깨가 따궁총을 누른 채 방아쇠를 당긴다. 저녁이 될 때까지, 어깨에 살이 시퍼렇게 물들도록 나는 방아쇠를 당기고 폐쇄철을 당겼다.

“전투도 끝났어.”

그것은 나도 알고 있다. 부상당한 동지들이 모두 숨을 거둘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내게는 여든일곱 발의 총알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총알로 동지들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없었다. 동지들도 그 것을 알고 있었다. 인민이 만든 총알은 오로지 인민의 적에게만 쓰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동굴에서 산의 능선을 바라보았다. 능선 북쪽에서 소란은 커지고 또 잠잠해지기를 반복했다. 미군의 전투기가 자주 날았다. 아군의 것은 없었다. 포탄이 터지고 산이 울렸다. 아군의 폿소리를 들은 것은 꽤나 오래 전의 일이었다.

전투기에서 쏟아지는 불벼락이 산을 때릴 때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살과 뼈가 깨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기에 살과 뼈는 너무 무른 것이다. 동무들은 침묵 속에서 죽었다. 불벼락 속에서 죽지 않은 동무들은 동굴에 끌려야 개돼지처럼 팔다리에 칼을 맞고 붕대에 감긴 뒤 가래 끓는 소리를 내다 죽었다.

“산을 내려가자. 산을 같이 내려가면 우리 다 살 수 있다.”

나는 문득 지금 이곳이 어디인가 궁금했다. 최명로 동무는 항상 말했다. 자신이 싸우는 곳이 어디인지는 꼭 알아야 한다고. 총에 맞고 포에 맞아 죽으면 혼백이 사방에 흩어지는데, 흩어진 혼백이 뭉치려면 꼭 제가 어디서 죽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게다.

양지바른 곳에 묻히지는 못하더라두, 죽어서 구신끼리라도 만나야 될 거 아니네. 팔로군에 있을 때에두, 뙤놈들 뭐라뭐라 하는 말에두 내가 그거 하나 만큼은 꼭 주워 들었다구.

그러나 나는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온통 젖은 채 추적거리는 이 산이 어디인지, 나는 설령 혼백이 된다 하더라도 결코 알 수 없을 터였다.

“전쟁이 끝난 것은 라디오에서 들었어.”

방아쇠를 당겼다. 다시 바우에서 불꽃이 터졌다. 어느새 비가 멎어있었다.

“빨갱이 새끼라서 라디오가 뭔지도 모르냐.”

나는 코를 쿨쩍였다.

“라디오는 멀리서 오는 소식을 목소리로 전해주는 거다.”

최명로 동지가 훌쩍였다. 그는 총을 맞고 두 시간이 넘게 살아 있었다. 그가 맞은 것은 카빈 소총이 아닌 에무원이었다. 총알이 뱃구레를 지나 등창을 터뜨리고 지나갔다. 상처를 만질 필요도 없었다. 피와 똥오줌과 삭은 음식물이 섞인 냄새가 진했다. 최명로는 누군가가 자신을 쏘아주기를 바랐지만 누구도 그럴 수 없었다. 최명로는 죽기 전에 훌쩍였고, 무어라 작은 노래 가락 같은 것을 중얼거리다 죽었다.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인터내셔널가는 아니었다고, 정치장교가 말했다.

“라디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너도, 너도 더 이상 싸우고 싶진 않을 거 아니냐.”

겨눔쇠에서 눈을 떼지 않았지만 겨눔쇠 너머로 다른 것이 희뜩거린다. 풀을 얹은 지붕이 보인다. 아직 푸릇하다. 그래, 보릿대가 아직 삭지 않은 모양이다. 누가 너털거리며 둑방을 걷는 것이 보인다. 대발이 녀석 걸음걸이가 아닌가 싶다. 녀석이 또 술을 진탕 처먹은 것이 틀림없다. 또 저러다 둑방에 자빠지고, 친구 두엇의 어깨에 실려 넌짓데며 집에 실려 갈 것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대발이는 회령에서 죽었다. 폭격을 피해 달아나다 헛발을 디뎌 구렁에서 머리가 깨져 죽지 않았던가.

누군가가 손을 흔든다. 어설픈 몸짓이다. 누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었다. 누른 손으로 눈을 씻고 낡아빠진 검은 치마에 손을 비벼 닦더니 다시 손을 빼내어 흔든다. 옷섶이 흔들리는 것만 봐도 눈에 익다. 그런데 저 이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그 말이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낯설다.

어머니.

“넌 이름이 뭐냐.”

놈의 목소리가 주저앉았다. 나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어두웠다. 연기 같은 하늘 위에는 구름들이 틀어 앉아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었다. 땅에서 습기가 무럭무럭 올라왔다.

“이름이나 알자.”

방아쇠를 당겼다. 돌에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놈의 목소리는 조금도 움찔거리지 않았다. 그것은 달고 지긋한 것이었다. 나는 또 하늘을 올려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잿빛 궁둥이를 도사리고 앉은 곰팡삭은 구름뿐이었다.

“빨갱이 새끼라도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있을 거 아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폐쇄철도 당기지 않았다. 문득 그것이 무거웠다. 총이 지쳤기 때문이리라. 나는 총이 총탄깍지를 머금고 쉬는 것을 보았다. 나는 오늘까지 칠천이백팔십삼 발의 총탄을 쏘았다는 것을 헤아렸다.

살아서 만 발을 쏘면 전쟁이 끝난단다야.

최명로 동무의 목소리가 귓바퀴에 웅얼거렸다. 낙동강에서였다. 나는 최명로 동지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그는 술에 취해 있었다.

되놈들이 그러지 않았간디. 왜놈들도 그렇게 말했다더라야. 만 발이다. 만 발만 쏘고 나면 죽지 않고 살아 갈 수 있다더라. 몇 명 죽이구 훈장을 받구 다 소용없다.

낙동강에는 전국 곳곳에서 온 사람들을 다 볼 수 있었다. 그들 모두가 해방군이었고 자원병이었다. 자신을 징집병이라고 말하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서울을 점령했다는 이는 입에 침버끔을 물고 그 광경을 수선스레 떠들어댔다. 삼천만 인민이 곧 삼천만 인민군이라니. 남조선 해방은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

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비도 그쳤다.”

구름이 끼었는데 전쟁이 그칠 수 있을까. 전쟁이 시작하고 오늘까지 칠백사십칠 일이 지났다. 나는 대략 하루에 열 발의 총탄을 소모한 셈이다. 그리고 또 매일 같이 세 덩이의 주먹밥과 두 통의 수통을 소모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나에게는 아직 물론 그러지는 않았다. 내게는 아직 쏘아야 할 이천칠백십칠 발의 총탄이 남아있다. 내 싹꾸에 남아있는 여 발을 다 쏘고, 그만큼씩 서른 곱절을 더 쏘아도 쏘아야 할 총탄이 남는다. 지금까지 쏜 것으로 치면 앞으로도 이백칠십이 일은 더 쏴야한다. 까마득하다.

“그만하자. 우리.”

라는 목소리는 놈이 낸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 말을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단순히 그저 짜증이 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더웠다. 비가 온종일 와도 이 남쪽은 덥기만 했다. 비가 그쳤으니 오늘 밤에는 다시 모기떼가 달겨 들겠지.

그만하자.

무릎을 세웠다. 무릎이 떨리는 것이 그는 처음으로 몸을 일으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설피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었다. 허리를 바로 세운 채 땅을 딛은 게 얼마만의 일인지. 몸을 일으켰다. 계곡 아래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들숨은 차갑고 단단했다. 숨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나강총을 던졌다. 다리뼈 같은, 너도 집에 가거라. 그 것은 한참을 이런저런 나무들과 부딪치며 계곡 아래로 사라졌다. 아직도 계곡 아래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나를 의심하는 겐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어설프게 손을 흔들었다.

흔들고, 다시 흔들었다. 깃발처럼, 머리 위로 빠르게 손을 움직일수록, 나는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아. 전쟁이 끝났구나.

그러자 바위 뒤에서 무언가가 머쓱하게 몸을 일으켰다. 길게 자란 머리를 넘긴 이마가 빛났다. 흰 이빨이 보였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저 계곡 아래에서 이쪽의 내게 악수를 하려는 것처럼.

손에 무언가 들려있다. 권총이다.

아.

꽝.

몸이 빙글 돌았다. 무언가 발칵 몸을 밀쳤다. 아니, 무언가 와서 부딪혔다는 것이 정확한 말일 것이다. 몸이 덜컥 뒤로 젖혀진다. 나자빠진 몸은 바위에 부딪고 두 바퀴를 거푸 구르다가 부러진 참나무의 둥치에 되게 박힌다. 그러더니 다시 뒹군다. 구른다.

통증은 둔하고 예리했다. 가슴팍에서 늑골과 허파를 타고 통증이 퍼졌다 눈을 껌벅인다. 눈은 아직 움직이는데 손끝에는 감각이 없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묘했다. 다시 손아귀를 한 번 쥐고, 다시 손을 오그리면 전과 다른 감각이다. 차차 감각이 사라진다. 사라진다기보다, 감각을 천천히 놓는 기분이다. 푸르르 몸을 떨었다. 바로 누운 것이 다행이었다. 엎어진 채로라면, 몸을 둥키지도 못한 채 흙을 불다가 죽었을 것이 아닌가.

등에 돌이 배겼다. 어깻죽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모서리가 군복 너머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죽기 전에는 주마등이 보인다고 했다. 내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일들이 활동사진처럼 스쳐지나간다고 했다. 그러나 내겐 그런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 피가 흘렀고 내가 총을 맞았다는 것을 실감하는 내내 몸이 둔해졌다. 등줄기가 끊겼으니 당연하게도 어깻죽지 아래로는 아무 감각이 없었다.

등줄기가 끊긴 병사는 늙은 소나 다름이 없다고, 총으로 쏘는 수밖에 없다던 최명로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맞다.

아직 채 쏘지 못한 이천칠백십칠 발의 총탄이 남았다.

하늘이 보였다. 상수리나무의 그림자 위로 희뿌연 것들이 뭉게뭉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침이 나왔다. 온 몸이 조각나는 듯 했다. 문득 그 아득한 것들의 움직임 사이로 무언가가 보였다. 그 작은 빛깔을 꼬질꼬질한 틈을 비집고 나와 조금씩 조각으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파란 색이었다.

아.

세상에 저리도 파란 게 있었는데.

하늘. 하늘. 날숨 같다, 날숨 같은 말이다. 그래. 숨을 뱉어야지. 이렇게. 그래. 다시. 숨을. 뱉어야.


-2-

1952年 7月 12日

계곡에서 공격을 받았다. 교전 끝에 빨갱이 놈을 사살했다.

놈은 담배를 가지고 있었다.


이전 05화촛불 맨드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