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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엽서시 Jun 24. 2021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서른 넘어 다시 읽기

세상에는 많은 소설들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스티븐 킹의 소설처럼 내 시간을 줄여가며 읽게 되는 흥미진진한 소설도 있고, 금방 책을 덮게 되는 소설도 있습니다. 재미는 없지만, 그 명성이 높은 탓(?)에 닫히는 눈꺼풀을 열어가며 읽는 책도 있지요.

그러나 이 소설처럼, 그 제목까지도 재미없는 소설은 흔치 않습니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一日).

재미있어 보이는 단어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미 고전의 반열에 들어, 명작이 되어버린 소설에는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소설에 있어서 제목도 중요합니다. 서점에 가면 알 수 있지요. 어떻게든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제목과 있어 보이려는 표지들이 네온사인으로 멋을 부린 간판들만큼이나 화려합니다.

간판들만큼이나 화려한 표지들

비단 요즘만의 일은 아닙니다. 명작 중에서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너와 나만의 시간」과 같은 제목은 어떻습니까. 무슨 내용인지 상상하는 재미가 있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제목부터 한숨이 나오지요. 그런데 이 소설은 학생들교실에 앉아 강제로 읽어야하는 작품입니다. 제목만 이렇고 내용은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냐구요? 그것은 이 작품이 명작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전혀 호기심과 흥미를 일으키지 않는 주인공, 구보는 어디 가냐고 묻는 어머니의 말에 대꾸도 없이, 어머니를 뒤로 한 채 집을 나섭니다. (사실, 구보는 작게 대답을 했습니다. 들리지 않았을 뿐이지요.)

구보는 일본에서 유학을 한, 우리가 배운 표현대로 하자면, ‘지식인’입니다. 그러나 스물여섯의 구보는 직장도 없고 처자식도 없습니다. 작년 여름에 선(소개팅에 가까운)을 본 일이 있었으나 잘 될 리가 없지요.

어머니는 그런 자식에게 제대로 된 직장을 가져라, 결혼 좀 해라, 조언도 하고 싶지만 자식은 어머니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보가 불효자냐, 그건 아닙니다. 어떻게 돈을 구하고 나면 제일 먼저 어머니더러 “무어 잡수시구 싶으신 거 없에요?”하고 묻기도 하고 가끔 며칠 밤을 새우기까지 해서 어머니의 옷감을 마련해주기도 하지요.

어쨌거나 다시 구보로 돌아와 봅시다. 제목처럼, 소설은 구보의 일일(一日), 그러니까 하루를 보여줍니다. 별 거 없습니다. 구보는 먼저 병원으로 향합니다. 구보가 어머니에게 종적을 밝히지 않았던 이유기도 하지요. 이미 눈이 좋지 않은 구보는, 최근 들어 속도 더부룩합니다. 귀도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아요. 혼자 제 질병을 진단해보기도 하지만 딱히 뾰족한 처방은 없습니다.

구보가 젋은 커플을 보고 질투를 느꼈던 화신백화점

시내로 나온 김에 여기저기 쏘다녀 보기도 합니다. 귀여운 자식을 안고 있는 젊은 커플을 보고 괜히 질투를 느끼기도 합니다. 목적 없이 탄 버스에서 구보는 전에 소개팅을 했던 여인을 우연히 보고 몸을 숨기기도 합니다. 몸을 숨긴 채, 구보는 속으로 저 여자와 잘 됐으면 어땠을까 망상하여보기도 하고, 과거 자신이 사랑했던 친구 누나를 떠올려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고, 직업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절절히 하던 구보는,

“자기는, 대체, 얼마를 가져야 행복일 수 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서울역 앞에서 바라 본 남대문. 아마 구보가 본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이후에도 별 건 없습니다. 서울역에서 구보는 초라한 노파나 병에 걸린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염증을 느끼기도 하고 금광 브로커들(요즘으로 치면 코인이나 주식에 전 재산을 때려박은 사람일까요)을 보고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그러다 학창 시절 동창을 마주합니다. 아, 자신이 가장 경멸했던 친구였는데, 이 친구가 성공했네요. 자랑하듯 주머니에서 금시계를 꺼내는 이 친구는 심지어 예쁜 여자친구까지 사귀고 있습니다(구보가 이제까지 어여쁘다고 생각하여 온 온갖 여인들보다도 좀 더 어여쁜).

당시의 종로 거리 모습입니다.

거리에서 구보는 도무지 종착지를 찾지 못합니다. 마침내 한 벗을 만나고, 둘은 종각 뒤의 한 술집으로 들어갑니다. 앗, 여급(아르바이트생)이 있는데 구보에게 말을 겁니다. 여급과 말을 하던 구보는 문득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은 모두 정신병자가 아닌가, 생각을 하고 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 역시 정신병자가 아닌가 생각을 하고 웃습니다.

구보는 술집 여급 중 하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기도 합니다. “너 내일, 낮에, 나하구 어디 놀러련?” 하고 불쑥 말을 꺼냈지요. 여급이 미소만 하며 대답을 하지 않자, 구보는 평소 소설을 쓰기 위한 메모를 적던 수첩을 주며, 좋으면 ○, 싫으면 ✕를 그려넣으라고 합니다. 나는 내일 아침에 그것을 펴볼 것이고 절대 미리 펴보지 않을 테니, 걱정 말라는 약속과 함께요.

새벽 두 시, 술에 취한 구보와 벗은 거리에 나섭니다. 여전히 구보에게는 가고 싶은 곳이 없지만, 그래도 구보는 가야할 곳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집으로 가야지요. 문득 구보는 오늘도 어머니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한낱, 갈 곳 없는, 이 보잘것없는 자신을 ‘거룩’하게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내일 또 만나자는 벗에게 구보는 드디어 말합니다.

“내일부터, 내 집에 있겠소.”

그리고 말합니다.

“창작하겠소.”

벗은 구보를 바라봅니다. 그러더니,

“좋은 소설을 쓰시오.”

진정으로 말해주네요. 구보는 마침내 행복한 기분으로 집을 향합니다.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구보에게 목적이 생긴 셈입니다. 아, 저기서 벗이 다시 뛰어옵니다. 그 수첩에 여급이 무엇이라고 적었는지 알고 싶다 합니다. 구보는 수첩에서, 세상 큼지막한, 그리고 또 정확한 ✕를 찾아냅니다. 그러나 구보는 여급에게 차인 슬픔보다도, 내일부터 자신의 목표가 생겼다는 조그만 행복으로, ‘은근히 비 내리는 거리’를 ‘좀더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갑니다.          

'은근히 비 내리는 거리'를 '좀더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


대부분 고등학생들은 이 소설에서 감명을 받지 못합니다. 이 소설 자체가 구보의 하루라고 하는, 정말 tmi 그 자체인데, 정말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을뿐더러, 그 구보의 하루마저 가슴을 울리지도, 흥미진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해, 저는 이 소설이 잘못된 것은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소설은 고등학생이 읽어야 할 소설이 아닐 뿐입니다. 그럼 이 소설을 언제 읽어야 하냐구요?


구보의 상황에서 읽을 때, 이 소설은 가치를 발합니다.


그러니까,

대학은 졸업했는데, 취직은 쉽사리 되지 않고, 서류 탈락의 숫자가 열 손가락을 넘어 막연한 두 자리 숫자가 될 때, 자소서 속의 나는 더 이상 ‘나’가 아니고, 나를 보는 가족들의 눈에는 연민과 동정이 서리고, 전 애인(또는 전 애인도 아닌 이성)의 SNS를 훔쳐보다 스스로 한심해져 핸드폰을 던지고, 약속은 없지만 간혹 생기는 약속이라곤 비슷한 사정의 친구들끼리 술병을 앞에 두고 우울한 얘기를 하는 것이 전부,

이미 취직한, 또는 결혼한, 친구들의 SNS에는 행복한 사진들이 계속 업데이트되는데, 나는 업데이트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늦게 자는 것도 늦게 일어나는 것도 더 이상 행복하지 않고,

갈 곳은 없지만 그냥 슬리퍼를 끌고 무작정 집 밖을 나와 공원을 걷다가. 잘못한 것은 없는데 잘못한 기분이 가슴을 꽉 메워 오다가 갑자기,


‘나만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이때 이 소설은 빛을 발합니다. 1948년 발표된 이 소설을 통해 우리는 우리와 같이 불안하고 우울한 청춘을 발견합니다. 구보의 하루에서, 완전히 똑같다고는 할 수 없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하루와의 교집합을,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지요.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고 호기심 느끼지 않는 우리의 하루,

세상이 내게 ‘크고, 또 정확한’ X를 지르더라도,

그래도 우리 역시 구보처럼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응원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응원에서 내일을 맞이한다면, 조금 더 밝은 하루가 될 수 있을까요. 사실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구보에게도 그랬겠지요.           


“좋은 소설을 쓰시오.”


소설은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그 관점에서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인생의 소설가입니다. 나는 내가 써가는 소설의 주인공인 셈이지요. 그런데 소설에 차마 적을 수 없는 하찮고 슬픈 ‘일일(一日)’들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소설’을 위해 그 ‘일일’들과 싸워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구보 박태원의 사진. 당시 유행하던 머리 스타일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구보는 소설가 박태원의 호입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박태원의 일일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니 이 소설에서 구보가 쓴 ‘좋은 소설’이 바로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소설입니다. 구보의 ‘일일(一日)’이 모여 만든 일일(日日)이 낳은 결과물이지요.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재미없는 소설입니다. 좋은 소설이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혹자는 좋은 소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어쩌면 이 소설을 명작으로 만드는 것은 지금 이 현대 사회일지도 모릅니다. 극히 소수를 제외하면 누구도 한 번쯤 ‘구보’가 되고 마는 세상이니까요.           

오늘, 당신의 일일(一日)은 어떤지요.

요즘, 당신의 일일(日日)은 또 어떤가요.

당신의 일일(一日)과 일일(日日)을 응원합니다.       

 

이상이 그린 박태원의 초상

PS. 구보와 함께 오전 2시까지 놀았던 친구가 이상이 아니었을까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이상과 박태원은 친한 벗이자, 서로 사정이 비슷한 벗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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