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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Mar 10. 2020

돌아오지 않는 순례자와 도서관에 업로드한 마인드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2019

아인슈타인 위인전을 보았을 때 '빛의 속도'라는 개념을 알았다. 아직까지도 진짜 인지는 모르겠지만 빛의 속도 이상으로 달린다면 과거로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때부터였다.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는 세상을 상상했던 건. 그래서였다. 이 책을 선택한 건.


아내에게 먼저 읽어 보라고 했다. 소설을 사거나 빌려오면 아내에게 먼저 읽어 보라고 하는 편이다. 아내의 반응을 보고 약간의 짐작 후 읽는 맛이 쏠쏠하다. 아내와 나의 취향은 비슷한 듯 다르기에 더 그렇다.


아내는 극찬을 했다. 우리 딸이 김초엽 처럼 자라서 이런 멋진 소설을 쓰면 좋겠단다. 그리고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고 있는 우리들은 더욱 감정이입이 잘 될 거라 한다. 여하튼 이 책을 읽고 김초엽에 대해 이곳저곳 찾아보고 소설가 김영하와 같은 소속사에 있다며 작은 눈이 동그래져 재잘대며 이야기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김초엽의 소설집이다. 총 7개의 단편 소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놓았다.

각 단편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본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유전자를 디자인할 수 되면서 열등한 유전형질을 없애고, 원하는 형질을 강화시킬 수 있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분리주의'와의 전쟁이다.


'스펙트럼'은 한 여성이 수명이 2~3년이 채 안 되는 외계 생명체와의 조우 후 벌어지는 종과 종간의 연민과 이기심에 관한 이야기이다.


'공생 가설'은  7세 이전의 뇌에 어떤 외계 생명체가 인간과 공생을 하고, 이로 인해 우리가 '인간성'이라는 것을 습득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웜홀의 발견으로 먼 우주를 갈 수 있게 되었지만 웜홀이 없는 곳은 시간적 거리가 더 멀어지면서 생기는 가족과의 이별을 말한다.


'감정의 물성'은 행복, 침착, 우울 등과 같은 감정의 물성을 사용하면 실제 그 감정을 느낌으로서 벌어지는 사회적 혼란을 그린다. 왜 사람들은 부정적인 감정까지 소유하고 싶어 할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관내분실'은 죽은 후 마인드를 도서관에 업로드하여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 자를 만날 수 있는 사회를 그렸다. 육체는 죽었지만 기억이 살아있는 상태란 무엇인가? 단지 기억을 통해 반응이 나오는 시뮬레이션인가? 감정이 살아있는 진짜 살아있는 바로 그 사람인가? 또한 분실된 엄마의 마인드를 찾는 과정에서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사회적 허상, 편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먼 우주로 갈 수 있는 통로를 발견하고, 그 통로를 지나가기 위해 인간 몸을 '강화'한다. 그 모습을 통해 미래에 나타날 새로운 종에 대한 고민을 해볼 수 있다.


(한 문장으로 표현하기를 괜히 시작했다. 뭐... 일단 했는데 제대로 핵심을 말한 건지는 아직도 미지수다. 한 문장이 아닌 것도 있지만 비밀.)


나머지 소설들도 좋았지만, 나에게 가장 생각할 거리를 많이 안겨준 소설은 바로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관내분실' 두 편이었다.



어떤 존재에게 살아갈 권리가 부여되는 가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결국 릴리는 나에게 태어날 가치가 없다는 낙인을 찍지 못했다.

-p48,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릴리는 유전자를 디자인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든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 열등한 부분을 미리 알 수 있게 되었다. 열등한 유전 형질을 없애고 우수한 형질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돈이 없어 유전자 디자인을 할 수 없거나, 돈이 적어 오류가 발생한 사람들은 외곽으로 밀려난다. 열등한 존재들-얼굴에 반점이 있다거나, 팔이 없다거나, 지능이 떨어진다거나-은 수가 더욱 줄었고, 혐오, 차별, 격리는 더욱 심해졌다.


여기에 환멸을 느낀 릴리는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자신과 닮은 아이를 만든다. 만드는 도중, 유전자 디자인에 오류가 생겼다. 아이는 앞으로 얼굴에 반점이 있게 될 터였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오류가 발생한 태아를 손쉽게 폐기해 왔다. 그러나 그 순간, 릴리는 그 아이에게는 '태어날 가치가 없다는 낙인을 찍지 못했다.' 올리브는 그렇게 태어났고 역설적으로 아이는 살아갈 가치를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었기에 살아갈 가치를 '타인'에게 '부여'받았다.


태어나기 전에 그 아이의 형태, 성질을 미리 알고 그로 인해 존재 가치가 타인에 의해 결정되는 세상은 상상의 산물이다. 김초엽의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은 바로 우리 옆에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유전공학이 발전해서 멀지 않은 미래에 유전자를 디자인할 수 있게 된다는 게 아니다. 우리 바로 옆에 타인에 의해 살아갈 가치가 결정되는 세상이 버젓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 여자에 대한 차별은 이미 주변에서 수백, 수천 년간 자행되었던 일이다. 이러한 차별, 혐오, 격리는 정책이라는 미명 하에,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핑계로, 개인의 자유라는 지고의 가치에 숨겨진 폭력으로 지탱되어 왔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열등하다 생각되는 존재에 대해 무관심하다. 이 무관심은 열등한 존재가 자신에게 조금의 불편을 주면 즉각 혐오라는 감정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들을 격리하자는 말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코로나 19를 우한 폐렴, 대구 코로나로 부르는 사람들, 중국인을 입국 금지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코로나 19 상황이 종료되면 이들은 또 다른 혐오의 대상을 찾으려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들에게는 기존 혐오의 대상들이 다수 존재한다.


내가 마을에 살았을 때 나는 사람들이 나의 얼룩에 관해 무어라고 흉보는 것을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다. 나는 나의 독특한 얼굴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마을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결점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때로 어떤 결점들은 결점으로도 여겨지지 않았다. 마을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결코 배제하지 않았다.

-P49,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릴리는 타인의 다른 점을 용인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다른 것이 그저 다른 것이 되고 그것이 오히려 장점으로 여길수 있게 되는 세상이 되었다. 인공자궁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혐오나 배제가 없는 세상을 산다.


그러나 올리브는 다른 세상이 궁금했다. 이 세상의 바깥이 궁금했다. 세상으로 나간 올리브는 차별을 경험한다. 그리고 자신이 살던 세상에는 왜 슬픔과 고통이라는 감정에 근원이, 실체가 없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올리브 이후 릴리의 세상 아이들은 성인이 되기 전 밖으로 순례를 떠난다. 그 순례자들은 세상을 돌아본 후 돌아올지 말지를 결정한다. 많은 순례자들이 밖에 남았다.


우리 이전의 순례자들은 지구를 조금이라도 바꾸어 놓았을까? 그곳은 올리브가 갔던 수백 년 전만큼이나 여전히 비탄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을까? 분명 세계 곳곳에는 순례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을 텐데, 그들은, 릴리와 올리브의 후손들은 세계를 바꾸기 위해 무엇을 했을까......

-p53,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아이에게 릴리와 올리브의 마을과 같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책도 그 이야기를 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격리를 말하고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완벽히 분리된 또 다른 세상. 그 세상이 행복할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그들은 행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순례자들이 돌아오지 않았던 것처럼 밖을 조금이라도 내다본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실체 없는 슬픔과 근본 없는 고통만으로는 기쁨과 슬픔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회의 인식이 변화해야 정책, 시스템이 바뀌는 건지, 정책이나 시스템이 변화해야 사회의 인식이 바뀌는 건지는 모르겠다. 다른 것을 틀렸다고 생각하는 인식은 차별을 낳는다. 차별은 혐오를 낳고 혐오는 분리를 낳는다. 이를 조장하고 자극하여 이득을 챙기는 무리들이 기득권을 형성하고, 이들은 자신에게는 유리하지만, 사회적 약자에게는 불리한 정책이나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이는 다시 혐오로 돌아오는 악순환에 빠진다.


이 악순환의 고리 안에서 사회가 책임지지 않은 대부분의 짐은 가족들에게 넘어온다. 사회가 떠 넘겨버린 짐을 질 수 있는 시간적, 감정적, 경제적 능력이 없는 가족들은 죄책감과 어깨의 짐을 맞바꾼다. 그들은 어깨의 짐을 내려놓고 죄책감을 가슴에 품는다. 가족들이 가슴에 품은 죄책감만큼 그리고 가족들이 어깨에 짊어진 짐만큼 사회는 편안해진다.


분리주의에 맞서 싸우는 순례자들을 주변에서 본다. 이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혐오, 차별, 격리에 맞서 싸운다. 나도 돌아오지 않는 순례자가 되어 '분리주의와 싸우다 잠들'고 싶다.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 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p54, 왜 순례자들은 돌아오지 않는가-




무언가 잘못된 게 아닌가. 배 속에 태아가 있고 그 심장 소리를 듣기까지 했는데 애정이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설명하기 힘든 감정들이 치민다.

-p228, 관내분실-
엄마가 무너진 계기가 산후 우울증이었다는 점에서 지민 자신에게는 일종의 원죄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 자신을 낳지 않았다면 엄마는 자신의 삶을 멀쩡하게 살지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과 딸인 자신이 그런 대우를 받을 이유는 없었다는 생각이 지민 안에서 상충했다.
-p240, 관내분실-


회는 이상적인 엄마 상을 그린다. 엄마라는 존재를 자녀를 위해 무언가를 무한히 해주는 존재로 묘사한다. 딸의 아이를 봐주고, 집에 와서 아이를 찾아가는 딸에게 허둥지둥 해 놓은 반찬을 건넨다. 딸은 집에 와서 반찬통을 풀어 보며 엄마의 사랑을 느끼며 눈물을 글썽인다. 이런 광고가 '엄마는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존재'라는 이미지를 우리에게 주입한다. 희생하지 않는다면 나쁜 엄마, 자격이 없는 엄마라고 태그를 단다. 모성을 꼭 있어야 하는 절대적인 것으로 만든다.


주변의 엄마들을 보면 자신과 아이를 동일 시 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가 잘 되는 것-무엇이 잘 되는 것인지의 문제는 일단 차치하고-이 인생의 목적인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아이를 위해 자신의 시간, 감정, 노력을 쏟아붓는다.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자신과 같은 삶을 살게 하지 않기 위해, 사회적으로 부족해 보이는 직업을 갖게 하지 않기 위해, 안정적이지 않은 길을 탐색하지 않게 하기 위해.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 하기 위해 아이에게 무언가를 강요한다.


엄마는 언제나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들었다.

-P242, 관내분실-
"왜 몰라주는 거니? 내가 이렇게 너를 위해서" "엄마는 나 말고 아무것도 없어? 난 너무 힘들어 이럴 바에는 그 엄마 노릇 좀 그만하면 안 돼?"

-p243, 관내분실-


아이가 성인이 되면 엄마는 홀로 남는다. 강요의 대상, 내가 만들어 내야 할 대상이 사라진다. 그 대상은 고마움은커녕 냉담하기까지 하다. 자기 자신과 아이를 동일 시 하며 자기 자신을 없애기까지 해야 했던 엄마는 피해자가 된다. 자연스럽게 그간 자신의 노력과 희생에 대한 보상을 바란다. 엄마의 보상 의식은 성인이 되어 버린 아이의 원죄의식과 만나 환상의 콜라보를 이룬다.


김초엽의 <관내 분실>에서는 사후에 마인드를 업로드할 수 있는 세상을 그린다. 도서관은 마인드를 업로드하고 이를 보관하고 남은 자들이 찾아와 죽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 준다. 이런 세상은 충분히 흥미롭지만 내가 주목한 부분은 엄마라는 단어로 자신의 엄마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표지 디자인 김은하. 열흘 만에 처음으로 찾은 은하의 이름이었다.

-p262, 관내분실-
엄마의 과거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직장에 다니고 어딘가에 소속되어 그녀의 이름이 쓰인 무언가를 만들었으리라는 생각도. 지민이 알던 엄마는 언제나 집 안에서 무기력한 얼굴을 한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왜 몰랐을까. 당연한 일이었다. 은하에게도 지민을 낳기 전의 삶이 있었을 것이다. 아이라는 족쇄에 아직 걸리지 않았던 대. 그리고 어쩌면, 엄마의 진짜 삶을 가졌던 때가.

-p263, 관내분실-


지민은 엄마의 죽음 후 한 번도 관심 갖지 않았던 '엄마의 마인드'를 보고 싶어 진다. 엄마를 만나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지만 분실되었다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지민은 분실된 엄마의 마인드를 찾는 과정에서 엄마가 아닌 '김은하'를 만났다. 그로 인해 비로소 잃어 버렸던 엄마의 마인드를 찾을 수 있었다. 지민은 엄마, 아니 김은하를 드디어 대면할 수 있었다.


'김은하'의 삶과 엄마의 삶 중 무엇이 '진짜 삶'일까. 정답은 없다. 둘 다 일수도 있고 하나만 선택할 수도 있다. 그저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이 결정할 문제다.


동시에 김초엽은 업로드한 마인드가 사람인지, 사람 흉내를 내는 시뮬레이션에 불과한지 질문한다.


어떤 사람은 마인드가 정말로 살아있는 정신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건 단지 재현 된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말한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 그건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p271, 관내분실'


진짜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엄마를 찾고, 그 과정에서 엄마가 아닌 '김은하'를 만난다. 그리고 지민은 "엄마를 이해해요"라고 말한다. 엄마인지, 엄마 프로그램인지 모를 대상에게.


엄마가 없어져야만 엄마라는 단어 뒤에 숨어있던 그 대상을 만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엄마가 없어져야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걸까? 뒤에 숨어있었던 걸까 아니면 숨겨 두었던 걸까?


자신을 이해한다는 딸의 말을 들은 도서관의 마인드는 행복할까? 엄마가 행복한 걸까? 마인드는 남은 자를 위한 걸까? 죽은 자를 위한 걸까?


생각이 많아지는 소설을 읽었다. 그래서 난 소설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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