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산책' 비긴즈 BEGINS

어쨌든, 산책. '남한산성南漢山城'

by 성실한 베짱이

산책의 '산'은 무슨 뜻일까? 막연히 '산(山)'이라고 생각했다. 산처럼 생긴 길-오솔길, 울창한 나무 사이의 소로, 잔디나 풀로 덮인 길, 등산로 따위- 만 걷는 이미지가 당연스레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산'은 흩어질 산(散)이다. '산문(散文)'의 '산'과 같다. 형식 없이 마음 가는 대로 가볍게 쓰는 글을 산문이라 하니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걷는 게 산책이다. 그럼 '책'은? '걸을 책'이라는 있지도 않은 한자를 떠올려봤지만 아니다. '지팡이' 책이다. 지팡이를 짚고 거닐 정도로 천천히, 부담 없이 걷는 것. 그것이 바로 산책이다.




아내는 불안하다. 코로나 19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기저질환이 있는 둘째 덕분에(?) 더욱 철저히 방역에 임한다. 다른 사람들이 방역 수칙을 지키지 않는 것에 더 예민하다. 자신의 건강도 걱정이다. 아이들과 남편 건강도 걱정이다. 학교도 걱정이고 어린이 집도 걱정이다. 절약 정신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남편도 걱정이고, 정의롭지 않아 보이는 나라도 걱정이다. 아... 불안하다.


아이도 불안하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서 놀자고 하고 싶지만 거절당할까 봐 걱정이다. 그렇다고 혼자 놀자니 재미가 없을까 봐 걱정이다. 온라인 수업을 하기 싫다. 그렇다고 하지 않으면 선생님께 혼날까 걱정이다. 엄마에게 짜증내고 마음을 풀고 싶은데, 엄마가 열 받아 쓰러지기라도 할까 걱정이다. 엄마는 몇 년 새에 참 많이 늙었다. 참나, 이것도 걱정이다.


말 못 하는 둘째도 매일 불안하다. 오늘은 뽀로로를 실컷 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할까 걱정이다. 어린이 집을 지금처럼 계속 안 갔으면 하는 데 갈까 봐 걱정이다. 선생님도 무섭고, 친구들도 무섭다. 특히 엄마와 떨어지는 건 더 무섭다.


나 역시 불안하다. 가족들이 너무 불안해하니 걱정이다. 불안함이 너무 많은 이 가족을 지켜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걱정이다. 내 안에 화와 짜증이 많아 걱정이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풀어버리기라도 할까 걱정이다. 램프의 바바라도 불러 이 불안을 종식시키고 싶지만 막상 램프를 비벼 나오면 하하하 웃으며 하늘만 날아다닐까 걱정이다.
<시간탐험대>, 1993년 10월 29일 ~ 1994년 3월 11일, MBC, 매주 금요일 6시 방영




걱정은 바다에 던져야 제 맛이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고 했던가. 우리 가족의 무수한 걱정들을 바다에 다 던져버리면 더 이상 불안에 떨지 않을 거다. 그래. 바다다. 서해보다는 동해로 가자. 이왕 걱정을 버릴 거면 드 넓은 태평양으로 뻗어나가는 동해로 가자.


조금 멀다고 느껴지지만 다 옛날이야기다. 고속도로가 아주 곧게 뚫렸다. 9시 전에 출발하면 2시간 30분이면 양양에 닿는다. 11시에 도착해서 바다 보고, 회 떠서 다시 출발. 3시 전에 집에 도착. 전혀 힘들 일이 없다. 1~2시간 바닷가에 머물며 파도가 걱정을 태평양으로 가져갈 테니.


아내와 9시 출발을 다짐했지만, 우리의 무의식엔 항상 그렇듯 10시 출발이 있었다. 예정보다 늦게 일어나 예정보다 천천히 준비를 하여 예정보다 늦은 10시 30분에 출발했다. 예상대로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 상태로는 바닷가는커녕 두물머리에서 족대로 물고기도 잡지 못할 지경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차선에서 빠져나왔다. 집으로 차를 돌렸다. 바다에 버리지 못한 걱정에 새로 생긴 걱정까지 얹어 마음은 한결 무거워졌다. 바다를 가기 귀찮아했던 아이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비친 듯했다. 그 미소는 날 더욱 짜증 나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그렇게 돌아오는 길 표지판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남한산성



저기라도 갈까?, 그래 그러자, 가본 지 오래되었네.


그렇게 우리는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 오락을 할 생각이었던 아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걱정을 바다에 버릴 수 없었지만, 나무에, 산에, 산성에 조금이라도 나눠주고 오자. 이렇게 생각하며 액셀을 밟았다.


12시에 도착한 남한산성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너무 더워 아이들이 쓰러지지 않을까 라는 걱정이 하나 더 생겼다. 그래도 이 걱정은 숲으로 들어가면 없어지겠지,라고 생각하며 걸었다. 어디에 가면 무엇이 있는지 찾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아이 손을 잡고 태양을 피하고 싶어 걸었다. 숲이 우거진 곳을 향해 걸었다.


빠르게도 걸었고, 느리게도 걸었다. 숲길이 마음에 들었는지 큰 아이는 재잘재잘 잘도 떠들었다. 오르막에서는 나에게 등을 밀어달라 했다. 작은 아이는 거의 처음인 숲길이 신기했는지 냅다 뛰었다. 결국엔 나에게 업혀서 산성을 내려왔다.


말 그대로 산책이었다. 자유롭게 마음 가는 대로 그렇게 걸었다. 걸음걸음마다 걱정을 내려놓았다. 날리는 땀 한 방울에 실어 날려버렸다. 자유로운 산책을 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마음 또한 그랬다.


목표를 수정하는 것에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길도 정해져 있다. 정해진 트랙에서 벗어나면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 같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정답이라고 하는 목표. 사회가 나에게 강요하는 목표. 그 목표로 가는 길조차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걷고 싶었다.


우리의 목표는 걱정을 내려놓는 거였다. 이를 위해 바다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이는 사회의 강요였다. 아니라고? 드라마 안 봤나? 힘들면 다 바다로 간다. 실연의 아픔을 등산복을 입고 설악산을 오르며 이겨내는 장면을 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어쨌든, 우리는 남이 정해놓은 길을 포기했다. 대신 너무 애쓰지 않고 자유롭게 걸었다. 놀랍게도, 만족스러웠다. 애써서 바다에 도착했을 때 보다 훨씬.


이렇게 우리의 토요 산책은 시작되었다.


멀리 가려 애쓰기 않고, 정상까지 오르려 애쓰지 않는 자유로운 산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