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산성 감자 인절미
어쨌든, 산책. 행주산성(幸州山城)
역사를 좋아했다. 특히 전쟁사를 좋아했다.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비며 칼과 창을 휘두르는 장군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심리 싸움을 하고 신박한 전략으로 자신보다 강한 적들을 물리치는 모습에 매료되었다. 머리가 조금 커서는 정보 수집, 철저한 전략 분석, 탄탄한 보급을 통해 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이야기에 흥분했다.
대학 시절, 답사부장이라는 걸 했다. 답사 코스를 짜고, 답사 자료집을 만들고, 학생을 모으고, 답사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전쟁사를 좋아했던 나는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을 쫘악 훑어보고 싶었다. 산성 위주로 코스를 짰고, 선후배, 동기들은 술에 쩔은 몸을 이끌고 산성에 올라야 했다. 그때 욕을 참 많이 먹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우리 가족은 <토요 산책>을 '남한산성'으로 시작했다. 무언가에 이끌리 듯 다음 산책은 자연스럽게 산성으로 정해졌다. 남한산성을 제외한 1시간 이내로 갈만한 산성. 행주산성이었다.
감자 인절미
<토요 산책>의 시작은 언제나 음식 준비다. 가는 길, 오는 길에 먹을 간식을 챙겨야 한다.
유튜브에 "하루 한 끼"라는 채널이 있다. 어찌어찌하여 접한 그 채널은 음식 만드는 법을 담담하게 알려준다. 목소리도 없다. "감자 인절미" 편을 보고 한 번 해 주었더니 반응이 썩 나쁘지 않았다. 만들기도 쉬웠기에 이번 산책은 '감자 인절미'와 함께 하기로 했다.
처음 만들 때는 전 날 쪄 놓은 감자를 사용했다. 딱딱해서 으깨는 데 굉장히 힘들었다. 이번에는 쪄낸 직후 으깼다. 아주 잘 부수어졌다. 그러나 잘 으깨진,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감자는 흐물거려 모양이 잘 잡히지 않았다. 식히면 좋았겠지만 식힐 시간이 없었기에 뜨거운 손을 귓볼에 갖다 대며 감자 인절미 모양을 잡았다..
아이들이 더 좋아할 수 있도록 맛에 자극을 더 했다. 지난번 보다 소금도 설탕도 조금씩 더 넣었다. 저번에 조금 심심하다는 평이 있던 터였다. 방울토마토, 남은 찐 감자, 초당 옥수수까지 준비해서 행주산성으로 출발했다.
역시 차가 막힌다.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오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우리에겐 '감자 인절미'가 있으니까. '감자 인절미'를 입에 넣는 순간, 입에서 녹아내림과 동시에 짜증도 함께 녹아내릴 것이 분명했다.
아내는 '감자 인절미'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고소한 콩가루를 온몸에 바른 감자가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다. 모양이 조금 들쭉날쭉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일단 입에 넣으면 모든 불안이 사라질 거다.
빤뽀(딸)에게 하나 권해본다.
"너 저번에 정말 맛있게 먹었다며, 하나 먹어봐."
"응... 아빠... 근데 내가 속이 좀 안 좋아서..."
아... 이런... 속이 안 좋다니. 이렇게 멋진 '감자 인절미'를 눈 앞에 두고 입에 넣을 수가 없다니. 아이야. 어찌 이리 안타까울 수가 있단 말이냐.
"그래? 많이 아파?"
"아니야... 그렇게 심하지는 않아. 조금... 좀 쉬면 괜찮아질 거야."
"그래, 그래, 좀 쉬어. 이거 진짜 맛있는 데, 아쉽다. 아빠가 나중에 또 해줄게."
"응! 고마워 아빠"
초당 옥수수 먹을 사람!
아내의 말에, 빤뽀는 지체 없이 이렇게 말했다.
"나! 나!"
내 귀를 의심했지만 이 말은 딸의 입에서 나온 게 맞았다. 찐이에게 빼앗기지 않으려 엄마 손에서 옥수수를 낚아채 갔다.
"너 배 아프다고 하지 않았어?"
"응? 아... 옥수수가 소화가 잘 되잖아..."
언제부터 옥수수가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제 찐이의 응가에서 나온 알갱이가 옥수수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나 보다.
상처 치유의 길, 행주산성 산책길
행주산성은 꽤 잘 정비되어 있었다. 권율 장군의 동상이 보였다. 그 옆으로 넓게 뻗은 길이 보였다. 우거진 숲길도 있었다. 숲길에서는 청설모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하늘이 예뻤다. 산성 위에서 아래로 굽어보았다. 한강이다. 조경된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한강도, 막 자란 나무 사이로 보인 한강도 모두 시원했다.
산성을 오르는 일본군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이를 막으려 애쓰는 조선군의 모습도 보였다. 빤뽀에게 행주산성이 어떤 성인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었다. 재미있었는지 더 해달라고 보챘다. 내려오는 길은 임진왜란 이야기와 함께 했다.
행주산성은 2km가 넘는 언덕길이었음에도 빤뽀와 찐이는 힘들어하지 않았다. 짧게 느껴질 정도로 이야깃거리와 볼거리가 많은 산책이었다.
난 '감자 인절미' 사건으로 입은 마음에 상처는 뜻밖의 청설모, 나무, 한강, 하늘, 아내의 미소, 아이들과의 대화로 사라져버렸다.
남은 '감자 인절미'는 돌아오는 길, 출출한 내 배를 완벽하게 채워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