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좌의 게임 <아빠 쟁탈전>
어쨌든, 산책. 아차산성 阿且山城
아... 역시, 역시는 역시다. 10시 전에 출발하기로 굳게 다짐했건만 일어난 시간은 9시. 1시간 안에 아이들을 깨우고 준비해서 나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예민한 첫째 빤보는 아침에 그 예민함이 정점을 찍는다. 꿈에서 연필 깍듯 예민함을 깎아내나 보다. 둘째 찐이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자~ 우리 운동 가자,라고 말하면 어떤 때는 네!,라고 바로 답한다. 어떤 때는 '시이~어!'(싫어),라고 말하며 한 발자국도 떼지 않는다.
산정호수를 가고 싶었다. 맑은 하늘과 맑은 호수를 보며 걷고 싶었다. 호수를 한 바퀴 돌면 몸과 마음이 모두 개운해질 것 같았다. 우리가 집에서 나온 시간은 11시. 차는 이미 밀리고 있었다. 차에서 왕복 4~5시간은 보내야 할 거였다. 1시간 산책을 위해 차에 그 시간을 머무르는 건 적절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정호수를 간다면 도착도 하기 전에 나를 포함한 가족 모두가 내뿜는 짜증 연기를 그대로 들이마셔야 할 거였다.
차선으로 우린 아차산성을 선택했다. 남한산성, 행주산성에 이어 아차산성. 뭔가 힙했다. 밀려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기에 더 힙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차를 몰았고, 아내와 나는 제발 기분 좋게 다녀올 수 있길 기도했다.
아차산은 가까웠지만 그런 만큼 사람도 많았다. 사람이 많은 만큼 차도 많았고, 우린 차를 댈 수 없어 주변을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위기가 찾아왔다.
빅데이터 그리고 M.I.
아내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아차산으로 갈 수 있는 다른 루트를 검색했다. 엄마들의 빅데이터를 뒤지기 시작했다. 방대한 데이터의 숲에서 아내는 우리의 니즈와 정확히 일치하는 결과물을 내놓았다. 사람으로 붐비지 않고, 자연과 가까우며, 너무 힘들지 않아 아이와 함께 갈 수 있는 곳. 빅데이터와 M.I.(Mom Intelligence)는 '고구려 대장간 마을'을 지목했다.
태왕사신기. 배용준이 광개토대왕 역할을 했었지. 보지는 않았다. 이 태왕사신기를 찍은 곳이 바로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고구려 대장간 마을'이란다. 서울 한 복판에(정확히는 구리지만) 세트장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오래전에 끝나버린 드라마라 너무 상업적인 시설이 되어 버린 건 아닌가, 라는 걱정을 하며 갔다.
영화 <안시성>도 여기서 촬영을 했다고 한다.
'고구려 대장간 마을'은 코로나 19로 인해 닫혀있었다. 옆으로는 등산로가 있었다. 아차산으로 오르는 길이었다. 입구에는 작은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당시에는 비가 오지 않아 계곡물은 거의 없었지만 아이들이 손으로 한 번 만져보고 발을 담가 보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입구를 지나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덥지 않았다. 내리쬐는 태양은 사라졌고 나무 사이로 숲 향을 머금은 잔잔한 바람이 코끝에 걸렸다. 흐르는 땀도 적당히 가져가 주었다.
등산로는 꽤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아이들과 왕복 1시간 정도 다녀오는 데는 아주 적당한 코스였다. 잔잔한 볼거리도 있었고, 한강을 그대로 내려다볼 수 있는 지점도 있었다. 중간에 지어진 골프연습장이 눈에 매우 거슬렸지만.
언제까지 올라갈 거냐는, 힘들어 죽겠다는 빤뽀의 불만이 있었지만 재잘재잘 즐겁게 떠드는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더 많았다. 천방지축 뛰어다니며 넘어지고 부딪힐 뻔한 찐이도 있었지만 큰 소리로 웃으며, 내 손을 잡아끌며 빨리 더 가자는 찐이가 더 많았다.
전쟁의 시작 <아빠 쟁탈전>
산책 중에 엄청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아이들은 아빠를 얻기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아빠 쟁탈전'의 시작이었다.
보통 밖에 나가면 찐이는 엄마를 선호한다. 물론 집 안에서도 엄마를 선호한다. 찐이와 함께 가려고 애쓰지만, 찐이는 엄마에게 붙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빤뽀는 그런 상황을 마뜩지 않아했다. 자기도 엄마와 함께 가며 엄마의 사랑을 듬뿍 느끼고 싶은데 막무가내인 찐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빠와 가야 한다. 쓰다 보니 조금 슬퍼진다. 어쨌든, 그랬다.
이번 산책도 그랬다. 빤뽀와 손을 잡고 산을 올랐다. 빤뽀는 요사이 마인크래프트에 빠져있다. 건물을 어떻게 지을지, 마을은 어떻게 구성하지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게임 이야기는 엄마보다는 아빠가 잘 통했다. 빤뽀는 자신이 구상한 마을을 신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찐이가 빤뽀와 내 사이로 들어왔다. 소리를 지르며 우리가 잡은 손을 끊어 놓았다. 그리곤 내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었다. 빤뽀는 화가 났다. 찐이에게 나도 아빠랑 같이 가고 싶다고!, 소리쳤다. 찐이도 지지 않고 '시이~어'(싫어),라고 외쳤다. 아빠를 얻기 위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왕좌의 게임 GAME OF THRONES
아빠라는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아이들은 경쟁했다. 소리 지르고, 사이로 끼어들고, 내 손을 잡고 달렸다. 그리고 이를 뒤에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한 여자가 있었다.
결국 막무가내인 찐이를 빤보는 이길 수 없었다. 이래서 장애를 가진 아이의 형제들이 힘들 수밖에 없겠다, 생각했다. 찐이는 아빠라는 '왕좌'를 차지했고, 빤뽀는 '어쩔 수 없이' 엄마와 함께 갔다.
아... 아빠가 몸이 2개였으면 좋겠다!
얘들아... 엄마 외롭잖아. 엄마하고도 함께 가렴.
아빠는 하나야! 싸운다고 2개가 되지 않아!
아... 이놈의 인기는 사그러들지를 않는구나.
아빠를 그렇게 원해?
둘 다 이렇게 아빠를 좋아해서 어쩌냐... 아이고...
난 물 만난 물고기 마냥 아무 말이나 쏟아냈다. 그리고 이를 뒤에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한 여자가 있었다.
치열한 '아빠 쟁탈전'의 승자는 찐이였지만, 진정한 승자는 빤뽀였다. 빤뽀는 그동안 찐이 때문에 엄마와 단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 힘들었다. '아빠 쟁탈전'의 패배로 인해 엄마와 단둘만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아내는 '아빠 쟁탈전'을 어이없지만 즐겁게 관람할 수 있었다. 나도 오랜만에 아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왕좌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