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실한 베짱이 Jan 24. 2022

경력단절 그리고 반쪽짜리

메인에 걸리면 좋지만 댓글을 생각하면 메인 노출이 꺼려지는 글

대한민국에서 비장애인 이성애자 남성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아니?


이 질문에 대부분의 내 친구들, 즉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비장애인 이성애자 남성 친구들은 이렇게 말한다.


술맛 떨어지게 웬 진지충 모드?
응? 그게 왜 축복이야?
(뭔 개소 ......)


진지하게 생각해 봤었다며, 정말 그렇다며, 우리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차별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는 대답을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누군가에겐 가지고 싶어도 절대 가질 수 없는 수많은 혜택이 이들에게는 당연하다. 더 심각한 건, 혜택을 발판으로 이룬 모든 것들을 자신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얻어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정말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 노력이 결실을 이뤄 지금 그 자리에 있다. 그들이 2021년 GDP 151위인 소말리아가 아닌 10위인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고, 발달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동성이 아닌 이성에 끌리게 태어났기에 노력이 결실을 이뤘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 중 하나라도 반대였다면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을 누리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 가장 중요한 사실을 하나 빼먹었다.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났다는 것.



아내의 분투

아내는 정말 싱그러운 사람이었다. (아! 물론 지금 싱그럽지 않다는 건 아니다. 지금도 충분히 싱그럽다.) 대학 때 처음 본 아내는 사람들 앞에서는 말을 줄이는 신중한 사람이었고 따로 만나면 말이 많아지는 푼수였다. 작은 장난에도 수줍어하며 귀엽게 웃었고 사람과 동물에 감정을 이입하는 선한 예민함을 가지고 있었다.


초중고 반장을 놓친 적이 없고, 고등학교 때는 도서부에서 이름을 날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6개월 공부하더니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군대에서 합격 소식을 듣고 난 아내가 천재가 아닐까, 생각했다. 나와 결혼했고 1년 후 딸을 낳았다. 신혼을 즐길 새도 없이 임신을 해서 안타까웠지만 태어난 딸이 모든 아쉬움을 날려버렸다. 출산 휴가 후 자연스럽게 1년 간 육아휴직을 했다. 육아휴직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동기들보다 먼저 승진했다.


복직 한 다음 해 둘째가 생겼다. 임신 초기 상황이 좋지 않아 조금 이른 휴직을 선택했다. 아이를 낳고 출산 휴가를 마치면 복직할 생각이었다. 이 휴직이 10년이나 이어질 거라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둘째는 발달장애가 있다. 처음엔 몰랐다. 알아채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신경 쓸 겨를 조차 없었다. 태어난 지 3개월째 청색증으로 응급실에 데려간 이후 ‘제발 살아만 줘’라는 생각으로 몇 년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 몇 년이 지난 후 ‘제발 살아만 줘’라는 생각은 ‘제발 장애만 없게 해 줘’로 바뀌었다. 다행스럽게도 소망 두 개 중 한 개는 이루어졌다.


아내는 10년 간의 휴직 후 복직했다. ‘시간선택제 전환 공무원’이라는 제도가 있다. 인사혁신처 홈페이지에 따르면 2005년부터 시행한 제도로 통상적인 8시간 근무를 줄일 수 있는 제도다. 아내는 2시까지 근무를 결정했다.


10년 만에 복귀한 직장. 모든 시스템은 바뀌었고,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업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일하는 분위기는 어떤지 아무것도 모른다. 만약 나보고 10년 쉬다 회사에 복직하라고 한다면 정말 끔찍했을 거다. 너무 무서워 매일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아내는 이런 곳에 떨어졌다. 게다가 시간선택제 근무자를 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장기 휴직자에 대한 적응 프로그램은 있을 리 없었다. 그냥 부서에 배치되었고 업무를 시작했다. 시간선택제 근무자에 대한 배려? 없었다. 한 사람 몫의 업무가 떨어졌다. 아내는 2시에 퇴근한 날 보다 그렇지 못한 날이 더 많았다. 니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많다며 풀타임이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갈거라 했다. 그래서 4시로 시간을 늘렸다. 애써 적응한 그 부서에 머물고 싶었다. 그러자 6시에 퇴근하기 시작했다.


시간선택제라는 제도만 있었을 뿐이다. 인식과 문화는 바뀌지 않았다. 한 사람 몫을 못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랬고, 업무나 부서가 돌아가는 프로세스가 그랬다. 나라면 자존감이 바닥을 쳤을 것이고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닌 존재.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느낌이었을 거다.


꿋꿋이 버티고 버텨 일을 해냈다. 첫째도 둘째도 엄마를 찾지만 주말에 나가서 밀린 일을 하며 버텼다. 6개월이 지나자 이제 조금 적응이 되는 듯했다. 엉켜있던 일을 내 방식대로 풀어냈다. 일도 손에 익고 분위기 파악도 된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다른 부서로 가란다. 네가 있는 그 자리에 한 명 역할을 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을 받으려고 한다, 는 뜻이다. 6개월간의 분투는 허공으로 흩어져버린다. 10년의 공백을 메꾸려고 울음을 삼키고 손가락의 떨림을 받아들이며 살았던 6개월을 부서 내 사람들은 그저 반쪽짜리의 발버둥으로 보았을 뿐이다.


새로 온 조직장이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자기 관리를 좀 해. 나도 애가 셋이야. 근데 이렇게 해냈잖아!”


네가 나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다고 조언질이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반쪽 짜리니까.



육아 휴직은 여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내의 휴직을 당연하다 생각했다. 남편도, 시어머니, 시아버지도, 장모님, 장인어른도, 언니도,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10년의 휴직 중 내가 맡을 수 있는 시간이 분명히 있었다. 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내가 버는 돈이 조금 더 많다는 알량하고도 비겁한 논리로 나 자신을 설득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내가 빠진 육아의 지옥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오직 그뿐이었다.


장애아이를 이 치료실 저 치료실로 데리고 다니며 주변의 시선을 버텨내고 장애인 동생에 시선이 쏠려 있는 엄마를 갈망하는 첫째가 있는 그 지옥으로 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내 인생이 끝장 날 것만 같아 무서웠다. 그래서 도망갔다. 회사로. 나도 힘들다는 고함으로. 도망친 그 자리를 아내가 채웠다.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비겁하다. 이미 힘든 일은 희생할 대로 희생한 아내가 옆에 앉아있다. 쓰잘데기 없는 변명을 조금 해보자면, 그때, 그러니까, 아내가 휴직을 이어가던 그 시절, 난 알고 있었을 거다. 내가 아내의 바통을 2년은 이어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숨을 곳이 있었다. 사회의 통념에, 분위기에, 관습에 숨기 쉬웠고, 난 숨어버렸다. 숨을 곳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오히려 아내만 휴직해서 아이를 돌보는 것이 말도 안 된다는 인식이 날 찔렀다면 어땠을까?



다시 일하고 싶은 여자들.

경력단절여성이란 혼인·임신·출산·육아와 가족 구성원의 돌봄 등을 이유로 경제활동을 중단하였거나 경제활동을 한 적이 없는 여성 중에서 취업을 희망하는 여성을 말합니다.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제2조제1호

정부는 경력단절여성등에 적합한 일자리를 창출하고 일자리의 질을 제고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합니다.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제8조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경력단절여성에 대해 취재하고 실태를 보고하려는 것도 아니고 경력단절여성을 위한 정책을 제안하기 위함도 아니다. (그럴 능력도 되지 않는다.) 지금 나와 내 아내가 처한 이 상황이 속상하고 서운해서 그저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을 뿐이다.


경력단절여성은 취업에 국한된 것인가? 장기간 휴직 후 회사로 돌아가는 여성이 분명히 있는데 이들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돌아갈 곳이 있는 상황과 구직을 해야 하는 상황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돌아갈 곳이 있다고 해도 그곳이 뒤틀린 시선이 가득한 곳이라면 무서운 건 동일한 거 아닐까? 요구하는 수준이 더 높다면 더 힘든 건 아닐까?


장애인 돌봄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장애인 돌봄 가정을 위한 제도나 정책이 있으면 어땠을까? 아내의 복직은 조금 더 빨라지지 않았을까?


시간선택제 근무에 대한 인식이 조금 더 보편적이었다면 어땠을까? 시간선택제 근무는 당연한 것이고, 이를 위한 보직이 마련되어 있었다면 어땠을까? 


시간선택제 근무를 하는 사람을 반쪽짜리로 본다. 선배든 후배든 경시하고 무시하는 시선을 갖는다. 이러한 시선이 폭력적인 차별의 시선이라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있다면 어땠을까?


단 몇 달, 아니 단 일주일 만이라도 현재의 업무나 회사의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시간선택제 근무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그런 선택을 했을 때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배부른 소리

아마 이 글이 다음이나 브런치 메인에 걸린다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며 부정적인 댓글을 달거라 생각한다. 메인에 걸리면 좋지만 댓글을 생각하면 메인 노출이 꺼려지는 두 감정이 충돌한다.


10년이나 휴직할 수 있는 꿈의 직장에 다니시는군요.

복귀가 경력단절이라고요? 무슨 헛소리를.

장애인 돌봄이요? 장애인에게 혜택을 주는 건 역차별입니다.

시간선택제 근무? 우리 회사는 그런 제도도 없고 있더라고 그걸 쓰면 일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제발 배부른 소리 좀 그만 하세요.

순화해보면 이런 댓글이 달릴 거다.


예전에 맘 카페에 장애인 부모에게는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을 초등 2학년이 아닌 고등학교까지 늘려주었으면 좋겠다는 글을 본 적 있다. 이 글에 달린 댓글을 보고 분노가 일었고 이내 눈물이 핑 돌았다. 무수히 많은 엄마들이 반대하더라. 여러 의견이 있었지만 한 마디로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는 거였다.


민주주의는 자유를 쟁취해가는 과정에 얻어진 전리품 같은 거다. 왕은 모두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귀족과 영주들이 왕도 지켜야 하는 법을 만들어 자신들의 자유를 얻어냈다. 부르주아들은 귀족들도 지켜야 하는 법을 만들어 자신들의 자유를 얻어냈다. 다음은 시민들이 싸워 자유를 얻어냈고, 다음은 노동자가, 장애인이 싸웠다. 여성들, 성소수자들도 자유를 위한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다.


갑자기 뭔 민주주의 같은 소리냐고? 다른 글에 썼든 글을 여기다 잘못 붙인거 아니냐고? 영주들이 싸울 때 농노들에게 그 싸움은 배부른 소리였다. 부르주아들이 싸울 때 노동자들에게 그 싸움은 배부른 소리였다.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높일 때, 장애인들에게 그 목소리는 배부른 소리였다. 


배부른 소리를 마구 해댔더니 이제 최소한 장애인들을 차별하는 말을 공식적으로 하면 모두가 비판하는 사회가 되었다. 10년 전만 생각해봐도 그렇지 않았다.


배부른 소리가 매번 나쁜 건 아니다. 나쁜 말이 나쁜 거다. 배부른 소리가 나쁜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부른 소리로 들린다면 진심을 담아 사과드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