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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Feb 12. 2022

오미크론이 만든 요상한 재택근무

재택근무는 이렇게 하는 겁니다.

몸이 좋지 않았다. 콧물이 터지더니 목이 아팠다. 통증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거슬렸다. 평소였다면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을 정도의 통증이었지만 불안했다. 오미크론으로 움츠러든 몸과 머리는 주욱 펴질 생각이 없었다.

쉬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쉬었는데도 불구하고 몸이 악화되면 오미크론을 의심해 볼 수 있을 거다. 아픈데도 몸을 막 굴려 악화된다면 오미크론 인지 아닌지 모를 수 있는 거 아닌가. 변인을 통제해야 올바른 실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주말이 지났고 몸 상태는 악화되지 않았다. 목에 약간의 불편감과 몸살 기운이 지속됐다. 달려서 땀을 한번 쭉 빼고, 안 아프다 생각하고 생활하면 그냥 회복될 듯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무리했다가 면역력이라도 떨어져 오미크론에게 들어올 빌미라도 부면 어쩌란 말인가.


내가 걱정하던 오미크론은 엉뚱한 데서 터졌다. 같은 층 다른 회사에서 오미크론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카톡이 왔다. 월요일 아침, 갑작스러운 재택이 결정됐다.


아이를 등교시키고 출근 지하철에서는 즐길 수 없는 아침의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커피를 내릴까? 차를 우릴까? 생각하다 어! 혹시 나 오미크론 아닌가? 목요일, 금요일 확진자와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는 거 아닐까? 주말에 은근히 몸이 안 좋았던 게 이것 때문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아침의 여유고 나발이고 없었다.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던 신속 항원검사 KIT을 찾았다. 정성스레 설명서를 읽고 면봉을 비장하게 꺼내 들었다.

최대한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설명서엔 1.5cm라고 되어 있지만, 눈부터 콧볼까지 재도 5cm를 겨우 넘을 것 같은 내 코를 생각해 봤을 때 생각보다 깊숙이 찔러야 했다. 손으로는 닿지 않을 그 영역 이상을 면봉으로 닦아내야 힌디.


아... 이런. 코피가 나기 시작한다. 원체 약한 코 점막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너무 깊숙이 찌르고 너무 과감히 닦아냈나 싶다. 피가 흐르지만 닦지 않는다. 난 피가 살짝 묻은 내 면봉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닦지 않은 피가 인중을 지나 입술 근처에 다다른다. 서둘러야 했다. 면봉을 (명칭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정체불명의 액체가 담긴 꼬갈콘 모양의 길쭉한) 투명 비닐에 넣고 액체에 담가 좌우로 돌린다. 면봉에 묻은 내 체액을 남기지 않고 다 짜낼 듯 잡고 면봉을 빼낸다. 뚜껑을 닫으면 투명 비닐은 스포이드로 변한다. 검사 킷트에 두 방울 떨어뜨렸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15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검사 키트를 따라 올라가는 내 체액이 담긴 액체를 쳐다본다. 선명하게 빨간 선이 나타난다. 한 줄이다. 두 번째 줄은 15분이 지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혼자 한 거라 효력은 없겠지만, 내 마음(사실상 아내의 마음)의 불안을 잠재우기엔 충분했다.

아내는 내가 보낸 이 사진을 보고서야 안심하고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항원 검사를 마치니 10시가 넘었다. 이제 면도를 해야겠다. 주말 동안 그냥 쉬는 바람에 난 산적이 되어있었다. 면도를 하지 않으면 왠지 지적인 활동을 할 수 없을 듯했다.


면도라는 건 자리를 옮겨가며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을뿐더러, 마땅히 면도를 할 만한 공간이 화장실을 제외하곤 없다. 절대라고 할 수는 없어도 웬만하면 면도기는 그 자리에 있다. 그런데, 그 면도기가 그 자리에 보이지 않는다. 감쪽같이 사라졌다.


엑셀에 함수를 넣다 보면 당연히 무심코 턱을 만지겠지. 만지다 무성한 수염을 느끼면 면도기 생각이 나겠지. 그러면 면도기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 궁금해질 거다. 그곳에 있어야만 하는 그 면도기 말이다.

5중 면도날 중 3번째 날이 팔로 변하고, 손잡이가 둘로 갈라지며 다리로 변해 달려가는 모습을 상상하겠지. 더 이상 너와 살을 맞대기 싫다며. 내가 사랑하는 건 네가 아니라며,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너와 살 수 없다며 소리치며 달려가는 면도기. 내가 미안하다고, 더 좋은 쉐이빙 폼을 쓰겠다며 소리쳐봤자 소용없을 거다. 나와의 사랑은 이미 끝났고, 사랑은 엎지른 물처럼 되돌리기 불가능하니 말이다.


둘째 찐이를 의심했다.


둘째는 아빠가 면도하는 모습을 보고 멋지다 생각했을 거다. 자기는 수염이 없으니 수염이 있는 친구인 물개에게 필요하다 생각했겠지. 인형의 집으로 가져가 보니 물개는 수염을 깎기 원하지 않았고, 할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하며 인형의 집에 놓고 온 게 아닐까? 그래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인형의 집과 주변 퍼즐과 블록 거리까지 탐문 수사를 벌였다. 어디에도 면도기는 없었다. 

난 와이즐리 면도기를 쓴다. 잃어버리면 마트에서는 구할 수 없다. 주문 후 최소 3~4일은 기다려야 하는데... 그 기간 동안 난 산적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시곗바늘은 11시를 빠르게 넘어가고 있었다. 사무실에 있었더라도 향후 30분간은 신중하게 점심 메뉴를 골라야만 하는 시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둘째는 면도하는 아빠의 모습을 멋지다고 생각한 게 아니었다. 자기가 멋진 줄 알고 거울을 보며 턱을 치켜든 채로 면도기를 목에서 턱까지 쓸어 올리는 모습을 보며 꼴 보기 싫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면도기를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려버린 거다. 그래 그것밖엔 없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면도기를 주문했다. 재택근무의 절반을 항원 자가 검사와 면도기 수사로 사용했다.


오후가 되니 큰 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왔다. 당연히 아이와 대화를 해야 한다. 회사에 대한 의무보다는 아이에 대한 사랑이 먼저 아닌가. 재택근무를 하며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건 퇴근 후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참고 대화하는 것보다 훨씬 재밌었다. 평소보다 원활히 대화가 이어지고, 더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의 희열을 느낀 후, 업무로 복귀했고 두 시간가량 집중했더니 퇴근 시간이 되어 있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내 재택근무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퇴근한 아내를 맞이하고, 저녁을 차리고,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둘째를 재우니 10시. 그때부터 못다 한 일을 시작했고, 난 밤을 새웠다. 신기한 건 밤을 새웠는데 아팠던 목이 싹 나았다는 거다.


그랬다. 내가 아무리 쉬어도 부은 목이 낫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염려였다. 오미크론 일지도 모른다는 염려. 내가 가족들에게 오미크론은 퍼트릴지도 모른다는 염려. 그리고 내 가족들이 지역사회에 오미크론을 전파할지 모른다는 염려. 이 염려가 몸의 회복을 더디게 만들었다. 항원 검사 음성 판정 후, 밤을 새웠지만 내 목은 악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완화되었다.


걱정, 불안, 염려. 모두 필요 없다.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그래. 원래 글이라는 건 어떤 깨달음이나 교훈으로 끝나야 제맛이다. 자책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 가 오늘의 깨달음이나 교훈이다.


궁금할까 봐 덧 붙인다. 면도기는 찾았다. 화장실에는 칫솔, 치약, 수건 등을 넣어놓는 공간이 있다. 거울의 뒷 공간이다. 거울은 거울임과 동시에 미닫이 문이다. 두 개의 문이 좌우에서 교차되어 열리는 데 그 사이 공간에 내 면도기가 들어있었다.


역시 무죄 추정의 원칙은 괜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미안하다. 둘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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