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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멈가 May 07. 2023

모든 순간이 에세이

글쓰기와 웜홀의 공통점

“이렇게 글을 써 놓으면, 나중에 내 아이에게 얘기해 줄 수 있겠지?”


과거, 내가 썼던 글의 한 문장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2014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모험적이며 역동적인 시기였다. 군 생활 내내 전역하면 호주에 가겠다고 다짐했다. 호주에서의 행복한 생활을 상상하며 힘든 군 생활을 버텼고, 우여곡절 끝에 서호주, 퍼스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 당시에도 무척 중요한 순간임을 직감했던 걸까?



일기조차 제대로 써본 적 없던 내가 호주에서의 일상을 매일 블로그에 기록했다. 돈이 없어 공중화장실에서 손 세정제로 머리 감은 이야기, 빵 하나로 버틴 하루, 첫 집을 구한 날의 설렘, 연이은 면접 탈락으로 좌절하던 나날들, 진지하게 귀국을 고민하던 밤, 그럼에도 버티어 첫 직장을 구했던 날의 안도감.


내 글의 독자는 단 한 명, 오직 나뿐이었다. 누구에게 보여주긴 민망한 그 어설픈 그 글을, 나는 꽤 사랑했나 보다. 별로 길지도 않은 이야기를 읽고 또 읽었으니 말이다.


호주에 다녀온 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지금도 답답할 때면 종종 그 오래된 블로그에 들어가 본다. 그렇게 지난날 발행한 글을 다시 읽다 보면, 머릿속에 ‘웜홀’이 떠오른다. 뜬금없이 웬 웜홀인가 싶겠지만, 글쓰기와 웜홀은 꽤 닮은 구석이 있다.



웜홀은 우주의 블랙홀과 화이트홀을 연결하는 가설적 통로인데, 이를 통해 시공간을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이 양자역학의 한 이론이다.


글쓰기가 내게 딱 그러하다.

글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연결된다. 오래전 쓴 글을 읽을 때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매번 그때의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된다. 심지어 가끔은, 힘든 날 썼던 글을 보며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이게 웜홀이 아니라면 무엇이 웜홀일까?


이는 꼭 여행 이야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쓰지 않았다면 스쳐 지나갔을 생각, 휘발되었을 지식 그리고 감사한 줄 몰랐을 일상. 소소한 일화 모두 웜홀이 될 수 있다. 그 통로를 통해 언제든지 과거를 여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순간이 에세이’라고 말한다.


모험 같은 삶을 꿈꿨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에 자주 답답함을 느꼈다. 그런데 내 글에서 나는 항상 주인공이었다. 특출 나지는 않지만, 삶에 희로애락이 있고 꾸준히 발전하는 모습이 매력적인 주인공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모험 중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마음의 병이 조금씩 치유되었다. 무의미하다고 여겼던 일상에서 가치를 발견했다. 누군가는 거창하다 할지 모르겠지만, 단언컨대 이 우주에는 글을 쓰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내 글에는 유독 실패한 일화가 많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반드시 참여하고 싶었던 프로젝트에서 탈락했던 얘기, 부족한 영어 실력 때문에 일을 그르쳤던 사건 등 다양한 실패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 실패담을 쓸 때면, '굳이 이런 것까지 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당시엔 자존심이 상했으니, 글로 남기는 것이 유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과 없이 모든 순간을 에세이로 옮겨준 과거의 나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 보니, 행복했던 날의 기록만큼이나 실패하고 좌절했던 경험 역시 큰 감동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다. 미래의 나에게 선물을 남기듯 실패담을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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