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멈가 May 08. 2023

애증의 신혼집

시작은 늘 조촐한 법


매일 같이 살다시피 한 친구들을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볼까 말까 한다. 최근 공휴일에 시간이 맞아 오랜만에 모일 수 있었다. 하필 비가 내렸지만,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기분만은 상쾌했다. 우린 주로 카페에서 만나 대화를 많이 한다. 물론 하는 얘기는 늘 비슷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근황 토크를 조금 나눈 뒤, 일 얘기, 육아 얘기를 한다. 그리고 결국엔 추억팔이를 한다.


최근엔 내가 결혼하여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흘러갔다. "그래도 신혼인데, 신축이 낫지 않아?" 구축 빌라를 구했다는 내 말에, 친구가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팍 씨.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구축 빌라에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왔나. 돈이 없으니까 들어왔지. 늦깎이 사회 초년생이 서울에 신축 신혼집을 얻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나.


와이프와 연애한 지 5년이 되자, 슬슬 결혼할 시기가 왔음을 느꼈다. 우리의 재산 상황은 좋지 않았기에, 일찌감치 현실에 순응하기로 했다. '그래, 시작은 늘 조촐한 법이지.'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로망이었던 새하얗고 모던한 분위기의 신축 오피스텔은 포기해야 했다. 물론 아파트는 꿈도 못 꿨고. 결국 눈을 낮추고 낮추어 구하게 된 것은 결국 공포의 체리 몰딩 빌라이다.


집을 구하기에 앞서, 와이프와 상의했다. 좁은 신축이냐, 조금이라도 넓은 구축이냐. 그때 우리는 둘 다 좁은 원룸에서 자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축이더라도 넓은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물론 그때도 체리 몰딩만큼은 피하고 싶었는데.. 결국은 이렇게 되었다.


이사 온 지도 벌써 반년이 되었다. 정신없이 집을 꾸미다 보니 시간이 빨리 흘러갔나 보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늘 집 앞에 택배가 잔뜩 쌓여 있었는데, 그걸 뜯어서 생각해 뒀던 자리에 배치하는 일이 꽤 즐거웠다. 낯설었던 공간이 이제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다시 보니, 썩 나쁘지 않다. 비록 모던한 분위기의 인테리어는 할  수 없지만, 구축 특유의 감성을 잘 이용하니 아늑한 분위기가 완성되었다.


이사 오고 가장 좋아하는 건 반려묘 폴라이다. 처음 하루 이틀은 숨어있더니 금방 적응하고 이제는 날아다닌다. 원룸에서 살다 쓰리룸에 오니 운동량도 많아졌다. 종종 개처럼 으르렁거리며 뛰어다니는데 원래 다른 고양이들도 이런 소리를 내는지 모르겠다. 폴라가 캣타워에서 쉬는 모습을 보면 이사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조만간 곰팡이 핀 벽지를 벗겨내고 결로 방지 페인트를 발라볼까 한다. 화장실에 녹슨 부품들도 교체해야 하고. 지저분한 벽엔 액자를 걸어서 가릴 예정이다. 아직도 손 볼 곳이 많이 남았지만 미루고 있다. 아빠한테 부탁하면 순식간에 해결해 주시겠지만, 스스로 해보고 싶어 남겨둔 것이다.


문득 부모님의 시작은 어땠을까 궁금해졌다. 생각해보니 자세한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부모님은 늘 내가 태어난 이후에 관해서만 이야기하셨으니까. 잘은 몰라도 분명 더 힘드셨을거다. 산전수전 다 겪던 시절이 아닌가. 그 힘든 세월을 이겨내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신 부모님이 대단해 보인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든 순간이 에세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