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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멈가 May 09. 2023

결핍의 기능

그리운 시절엔 늘 결핍이 있었다.


정신없이 회사 생활을 하던 중 오랜만에 약속도, 계획도 없는 휴일을 맞이했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치니, 날씨도 제법 좋았다. 앞 건물에 가려져 채광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아침햇살이 잘 들어왔다. 역시 휴일에는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법인가 보다. '거 캠퍼스 걷기 딱 좋은 날씨네.'라는 생각이 스치자마자 몸을 움직였다.


딱히 만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캠퍼스를 걸으면 기분이 좋아져 종종 다녀온다. 그 캠퍼스에 반해, 대학원 진학을 결정했을 만큼 우리 학교는 조경이 아름답다. 대충 씻고, 좋아하는 초록색 카디건을 입었다. 거기에 걷기 좋은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학교 정문 근처에 좋아하는 카페가 있다. 그곳에 들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주변 건물이 그새 많이 바뀌었다. 카페까지 없어졌을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카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손님은 없었다. 아침 햇살, 한적한 거리, 혼자 있는 카페. 모든 게 완벽했다. 이제 커피만 마시면 더할 나위 없이 최고의 하루가 되는 것이다. 내가 주문한 커피는 초콜릿 맛과 고소한 맛이 나는 원두라고 한다. 그건 잘 모르겠고 그냥 맛있다. 예전에도 늘 같은 커피만 마셨다. 다음엔 다른 원두도 먹어봐야지 생각도 했지만, 다시 오면 또 같은 걸 마시게 된다.



이렇게 좋아하던 카페지만, 사실 학생 때 자주 오지는 못했다. 아메리카노가 한 잔에 4천 원이나 하기 때문이다. 당시 학교 식당의 점심값이 3,500원이었으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보통은 옆에 있는 테이크아웃 전문 카페에서 천 원짜리 커피를 사 들고 학교에 갔다. 이제 이 맛있는 커피를 부담 없이 마시고 있자니, 느낌이 이상했다. 어른이 된 것 같아 뿌듯하면서도, 그때가 그리워졌다. 돈은 없어도 낭만이 넘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그리운 시절엔 늘 '결핍'이 있었다. 첫사랑을 떠올리면 어리숙했던 내 행동들이 함께 생각난다. 1%의 용기가 부족해 손도 잘 잡지 못했었다. 어쩌다 잡게 되면 등이 뜨거워지고, 곧 식은땀을 흘리고는 했다. 결국 '넌 너무 답답해.'라는 말과 함께 이별을 통보받았다. 서툴렀기에 더욱 그리운 추억이다. 그때를 회상하면 몇 장에 걸쳐 쓸 수도 있지만, 와이프가 보게 되면 곤란하니 짧게 써야 한다.


새내기 시절엔 돈이 없어서 가끔 이상한 짓을 했다. 대학 동기들과 외진 곳에 둘러앉아, 컵라면과 막대 사탕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신 것이다. 전문 용어로는 '노상 까기'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5천 원이면 충분히 놀 수가 있었다. 돈이 없으면 안 마시면 될 것을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입꼬리가 또 올라가는 것을 보니, 즐거웠던 추억임은 분명하다.


어쩌면 결핍이 있었기에 그때가 더욱 그리운 것은 아닐까? 아니면 결핍 자체가 그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결핍은 생각보다 빨리 채워지기 마련이다. 시간이 지나고 언젠가 이 결핍이 해소되면, 분명 이 순간이 다시 그리워질 것이다. 이제는 새콤달콤을 흥청망청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뿌듯함보다는 하나씩 아껴먹던 그 시절이 그리워지지 않던가. 그러니 너무 큰 걱정으로 현재를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부족한 것이 아닌, 가진 것에 집중하고 감사하는 태도를 갖는다면 결핍은 저절로 해소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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