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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멈가 May 10. 2023

진화의 흔적

와이프를 이길 수 없는 이유


사람은 흔적을 지우는 일에 참 열심이다. 호텔에서는 손님이 퇴실하자마자 머물렀던 흔적을 없애고, 밤사이 엉망이 된 주점가 골목은 해가 뜰 때면 원상 복구된다. 그리고 입었던 옷은 깨끗하게 세탁해 하루의 흔적을 지운다. 애초에 남기지 않는다면 좋을 테지만, 불가피하게도 우린 늘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


흰옷을 입은 날에 꼭 빨간 국물 요리를 먹게 된다. 앞치마까지 하고 최대한 조심히 먹어보지만, 그놈의 빨간 국물은 앞치마를 피해 기어코 흰 면에 튀고 만다. 바로 휴지에 물을 적셔 지워보려 하지만 역시나 잘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게 점심의 흔적이 남으면 오후 내내 찝찝한 기분이 된다.


우리는 왜 이토록 흔적을 지우려고 안달일까?


생물학도 입장에서, 인간도 동물의 한 종이라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동물은 흔적에 예민하다. 야생에서 포식자는 영역을 확장하고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흔적을 남긴다. 여기저기 대소변을 누고 몸을 비벼 채취를 남기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인류의 선조는 포식자가 아닌 피식자에 가까웠다. 늘 쫓기고 도망을 다녀야 했다. 흔적을 남기는 일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흔적을 지우려는 행동 자체가 진화의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과거엔 유용하게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제는 불필요하여 퇴화된 기관을 ‘흔적기관’이라고 한다. 이 흔적기관은 진화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꼬리뼈이다. 그 밖에도 귀를 움직이는 근육인 이개근이나 털세움근 등이 있다. 이러한 흔적기관처럼, 흔적을 지우려는 행동 역시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성향은 아닐까?


흔적과 관련하여 와이프와 자주 갈등을 겪는다. 아내와는 26살에 만나 5년을 만나 올해 결혼했다. 5년이라는 연애 기간이 결코 짧지 않기에, 나는 그녀에 대해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함께 살아보니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출하고 집에 돌아오면 바로 옷을 벗어 정리하는 나와는 달리, 와이프는 여기저기에 벗어 놓는다. 식사하고는 설거짓거리를 남겨놓는다. 그리고 휴지를 사용하면 탁상 위에 그대로 남아있다. 알고 싶지 않아도 나는 와이프가 오늘 뭘 입었는지, 밥을 먹었는지, 코를 풀었는지 모두 알게 된다. 기어코 흔적을 남겨 내게 무엇을 했는지 알려주는 것이다. 친절하기도 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나, 그리고 기어코 흔적을 남기는 와이프.. 이건 마치 피식자와 포식자의 관계가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이제 모든 것이 설명된다. 킹사이즈 침대로 바꾼 뒤에도 여전히 끄트머리에서 잘 수밖에 없었던 이유, 아내의 감정 기복에 눈치를 보는 내 모습, 그리고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소변이 튀지 않도록 앉아서 봐야 하는 현실.


내 모든 행동이 피식자의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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