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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멈가 May 12. 2023

피라미드의 저주에 걸리다.

이집트 여행 에세이


 한참을 삐그덕 거리며 달리던 버스가 멈추고 문이 열린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시 시선이 집중된다. 낯선 동양인에 대한 호기심 때문일까? 그들은 내가 버스에 타던 그 순간부터 나를 관찰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쳐다보는 바람에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어쨌든 나는 이번에 내려야 한다. 많은 눈동자들을 뒤로한 채, 흙 반 아스팔트 반인 도로에 발을 내디뎠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드디어 만날 수 있다 생각하니 다시 가슴이 뛰었다.


 버스에서 내려 다시 방향을 찾으려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거리 상으로는 아직 한참 더 걸어야 했지만 피라미드는 이미 저만치에서 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 피라미드를 향해 걸어갔다. 평생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른다. 크다고는 익히 들었지만, 실제로 본 피라미드는 '정말로' 거대했다.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한참을 걸어도 쉽사리 가까워 지질 않았다. '혼돈의 도시'라 불리는 카이로와는 대비적이게도, 피라미드는 그 자태가 굉장히 반듯했다. 카이로의 모든 질서를 피라미드가 빼앗아갔나 보다.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은 한 템포씩 빨라졌다. 그때, 뭐 하냐며 대학 동기에게 카톡이 왔다. 뭐하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나는 이제 꽤 가깝게 보이는 피라미드 사진을 찍어 보내며 답장했다. '나 지금 피라미드 가고 있어.' 친구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이내 진짜로 간 거냐며 반문했다. 믿기지 않겠지. 나도 안 믿기는데. 피라미드가 눈앞에 있는데도 믿기지가 않는데!






 나는 감정의 폭이 굉장히 적은 편이다. 기쁨, 감동, 유쾌함 등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는 것도, 표현하는 것도 내게는 조금 어렵다. 그중에서도 가장 만나기 힘든 감정은 바로 '설렘'이다. 설레었던 기억을 찾으려 최근 일상부터 돌아보았지만, 쉽사리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렇게 점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8년 전의 이집트 여행에 닿은 것이다. 물론 그 사이에도 여러 설레는 일들은 있었다. 다만, 잔잔한 감정의 결을 가진 내게, 큰 파동을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집트는 큰 돌멩이와 같다. 내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피라미드를 향해 걷던 그 순간보다 더 큰 설렘을 아직까지 만난 적 없다.



 나의 이집트 사랑은 아버지가 사주신 책 한 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11살 생일이었던 것 같다. 책이라고는 절대 보지 않던 시절인데, 아버지는 왜인지 나를 서점에 데려가셨다. 그때 우연히 집어든 것이 <세계의 7대 불가사의>라는 만화책이었다. 일곱 가지 불가사의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단연 피라미드 이야기였다. 그때 마음에 씨앗이 심어졌나 보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이집트-한국인 친목 사이트에서 현지인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씨앗에 싹이 트고 자라, 결국엔 꽃을 피워 이집트 땅을 밟게 했다.



 새로운 나라에 가면 각기 다른 적응기를 겪는다. 이집트에서는 유난히 힘든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처음 도착한 날 밤, 대중교통은 이미 끊겨, 공항에서 호텔까지 택시를 타고 가야 했는데, 기사들은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불렀다. 나는 흥정을 시도했고, 그중 한 기사가 의외로 순순히 승낙했다. 그런데 도착하니 약속된 가격의 두 배를 요구했다. 짐도 함께 실었으니 더 내야 한다는 것이다. 친절하던 사람이 그렇게 돌변하니 많이 당황했었다. 게다가 그렇게 도착한 호텔은 난방이 되지 않아 밤새 추위에 떨면서 잤다. 나름 11개국을 여행한 경험이 있지만, 이집트만큼 불편하고 무질서한 나라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많은 일들을 겪고도, 나는 이집트에서 가장 즐거웠다고 말한다. 이집트에 다녀온 뒤로, 이집트에 대한 생각을 안 한 날은 손에 꼽을 정도이니 말이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피라미드의 저주는 아닐까?


 이집트에 다녀온 기억으로 아직도 산다는 성우 서유리의 말에 공감하고 또 공감한다. 이처럼 가슴 깊이 새겨진 설렘은 퍽퍽한 일상을 버티게 해준다.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반응하는 걸 보면, 이집트에서의 추억만큼은 뇌가 아닌 심장에 저장되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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