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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멈가 May 13. 2023

사물의 역사

그냥 있는 것은 없다

 화장실 바닥을 보면 배수구 쪽이 낮도록 경사가 있다. 이는 물이 잘 빠지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부터 화장실 바닥은 그렇게 설계되었을까?


 ‘타일 보조, 주 6일 근무, 일당 140달러.’


 가진 돈이 거의 바닥날 때쯤, 마지막까지 피하고 싶었던 막노동 일을 시작했다. 머지않아 집세도 못 내게 생겨,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마치 어제의 일처럼, 처음 출근하던 날이 눈에 선하다. 이른 새벽, 나는 거친 말씨의 현장 노동자들을 상상하며 인근 트레인 역에서 픽업 차량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과 달리 그리 거친 사람들은 아니었고, 나는 반년 동안 그들과 함께 녹색 봉고차를 타고 온갖 동네의 건설 현장을 다녔다. 거실 바닥과 주방 벽면 등 설계도에 따라 타일을 까는 것이 우리의 임무였다.


 보조자인 나는, 가장 먼저 타일을 각 위치에 옮겨 놓는다. 한 장 한 장은 가볍지만, 그 묶음은 무게가 상당하다. 타일을 모두 옮기면 쉴 틈 없이 곧바로 삽질을 시작한다. 흙을 퍼 나르고 그 위에 시멘트와 물을 섞어 배합한다. 이 첫 작업이 끝날 때쯤엔 이미 쓰러질 듯 힘들었다.


 타일이라고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붙이지 않는다. 위치와 무게에 따라 시공 디테일에 차이가 있다. 그중에서도 화장실 작업은 유독 어렵다. 변기와 배수 구멍을 염두해야 하고 화장실 전면에 타일을 붙이므로 작업 면적 또한 상당하다. 그뿐만 아니라 바닥에는 경사를 주어 배수를 원활하게 해야 한다. 콘크리트 시공 단계까지는 화장실 바닥이 평평하다. 그대로 타일을 깔면 물이 빠지지 않는다. 타일 기술자가 그 경사를 만드는 것이다.


 타일의 높낮이는 글루라는 타일 압착 시멘트의 두께로 조절된다. 글루를 두껍게 바르면 높아지고, 적게 바르면 낮아진다. 경사는 완만하고 부드럽게 이루어져야 하며 주변 타일과 격차가 없어야 한다. 며칠 후 글루가 마르면 타일을 밟아도 되는데, 그때 다시 타일 사이를 메우는 줄눈 시공을 한다.



 너무나 익숙해서 관심조차 두지 않는 타일 하나에도 이렇게 많은 노력이 들어간 것이다. 예전엔 매일 화장실을 이용하면서도 타일에 대해 특별히 무슨 생각을 해 본 적 없다. 그런데 이제는 변기에 앉아 있으면 기술자들이 타일 붙이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최근 영화관에 갔다. 쿠키 영상이 있다고 하여 영화가 끝났지만 나가지 않고 기다렸다. 쿠키 영상은 엔딩 크레딧 이후에 나오는 추가 영상인데, 아주 짧지만 다음 작품을 유추해 볼 수 있으므로 기다려서라도 보려 한 것이다.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 생각보다 길다. 와이프는 언제 나오냐며 눈치를 주는데, 그 이후에도 한참 동안 끊임없이 올라온다. 조명, 영상, 음악, 특수효과 등 그 구성과 인원이 참 다양하기도 하다. 두세 시간짜리 영화 한 편을 만드는데 정말 많은 사람이 노력했구나 싶었다.


 세상에 그냥 있는 것은 없나 보다.

크기가 작든, 크든, 자주 사용하든 그렇지 않든 모든 사물에는 저마다의 역사가 있다. 누군가의 고뇌와 노력이 깃들어 있다. 그런 생각으로 어떤 물건을 보면 새롭게 느껴진다. 때로는 좋은 글감이 되기도 한다.


 와이프도 함께 그런 생각을 했다면 좋았을 텐데. 고작 이거 보려고 한참을 기다리게 했냐며 핀잔만 주었다. 역시 인생은 실전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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