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나는 예스(Yes)맨이었다. 들어오는 약속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덕분에 아침마다 내 몸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저녁이면 또다시 약속 장소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도 불 보듯 뻔했다. 숙취와 피곤함에 쩔어 하루 계획을 망치는 일이 잦아졌다. 퇴근 후에도 자기계발하는 삶, 이른바 '갓생'은 고사하고 정상적인 일상을 소화하기조차 힘들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물론 대책이라고 해봐야 특별한 건 없었다. 그저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가지 원칙을 만들었다. 바로 '일주일에 단 하나의 약속'이었다. 주에 하나 이상의 약속을 잡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나머지 약속은 모두 거절해야 했다.
거절하는 것도 연습이 필요했다. ‘미안, 오늘은 계획이 있어서’라고 말하면, 상대는 반드시 무슨 계획이냐며 되물었다. 그럼 나는 혹여나 기분이 상할까 쩔쩔매며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돌이켜 보건대 나는 분명 '착한사람증후군'이었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약속을 거절하기 위해서 내가 왜 변명이나 설득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럴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나는 보다 직설적이고 단호하게 거절할 필요성을 느꼈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한두 번 해보니 별거 아니었다. '도대체 계획이 뭐냐' 물으면 똑같이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대답한다. 다만, '뭐야, 별거 없네. 그냥 나와~'하는 친구에겐 '나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거절하기의 효과는 놀라웠다. 집 나갔던 나의 시간이 돌아왔다. 더 이상 내 하루에 다른 사람의 시간이 침범하지 않았다. 비로소 스스로를 돌볼 시간이 생긴 것이다. 이제는 사전에 약속되지 않은 만남은 모두 거절한다. 지인들도 나의 시간을 존중한다.
솔직히 말해서, SNS를 통해 나 없이도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면 '아주 가끔' 소외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시간을 내게 투자함으로써 더 성장함을 느낀다. 이를 거절의 미학이라 부르고 싶다.
사람은 착각의 동물이다. 세상이 자신을 위주로 돌아간다고 착각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다. 내가 당장 사라져도 지구는 잘 돈다. 친구들도 잘 논다.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 나만의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비록 세상의 주인공은 아닐지언정, 내 삶에서만큼은 주인공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