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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멈가 Oct 12. 2023

인상적인 여행의 법칙


2018년의 어느 날.


마음이 심란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원에 입학했지만, 잘한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미 20대 후반의 나이였고, 선택한 전공은 ‘유망’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그 무렵, 여자친구와 헤어지기까지 했다.


연구실에 앉아는 있지만 논문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연인지 때마침 일본 특가 항공 메일을 받았다. 마음을 추스르기 위함이라고 합리화하며 덜컥 예매했다. 바로 일주일 뒤 출발하는 비행기였다.


떠나는 날, 다행히 부모님은 외출 중이었다. 메모를 한 장 남겨 놓고는 가볍게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아들은 잠시 속세를 떠납니다. 찾지 마시오.'




좋은 여행이란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련해지는 여행이라고 답할 것이다.


국내냐 해외냐, 혹은 돈을 얼마나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돈을 많이 써도 별로인 여행이 있는 반면, 별것 없었는데도 유독 기억에 남는 여행이 있다. 그러한 인상적인 여행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제주도와 가고시마. 최고라고 할 수는 없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여행지 두 곳이다. 섬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둘 사이엔 딱히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여행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는 장소에 달려 있지 않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내적인 요인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받는다. 나는 두 여행 모두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던 시기에 다녀왔다. 착잡함과 두려움 그리고 약간의 설렘. 한마디로 표현하긴 어려운 감정을 안고 떠났다.



마음이 그러하니 여행지에서 절로 사색에 잠겼다. 복잡한 도시에서든,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든, 나는 계속 어떤 생각에 빠져있었다.


돌아올 땐 답을 찾아오겠노라 다짐했지만, 애초에 답이란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 결국 딱히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고민에 대한 답은 구하지 못했으면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때 깨달았다. ‘아, 나는 사색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구나.’


먹는 걸 좋아하는 와이프는 늘 먹었던 음식으로 여행을 기억한다. 와이프에겐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었던 여행이 인상적인 여행인 것이다. 그처럼, 내가 제주도와 가고시마를 기억하는 이유는 충분한 사색이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하고 필요한 것을 맘껏 충족시키고 돌아온 여행을 가장 인상적으로 느끼는 것. 나는 그것을 인상적인 여행의 법칙이라 부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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