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대신, 그녀 부모님을 만났다
지난주 어느 날 저녁,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채소로 국을 끓이고, 달걀말이를 하고, 생선을 구워낸 그런 평범한 저녁. 휴대폰이 여러 번 부르르 떨더니 화면에는 금세 친구 H가 보낸 메시지가 가득 찼다.
"우리 할머니 오늘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엄마한테 방금 연락왔어ㅠㅠ
부모님은 내일 아침 비행기로 지금 막 티켓팅했는데, 오빠가 나 혼자라도 가라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치매 있으셨어도 몸은 건강하셨는데 갑작스럽네, 하... 안 믿어진다."
H는 고등학생 시절 머나먼 지구 남쪽 나라로 이민을 갔지만,
마침 기술의 발전으로 (다행히 시차가 별로 없는 나라였다) 그 후에도 매일같이 MSN 메신저와 스카이프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함께 성장하고 어른이 되었다. 그녀가 한국에 올 때마다 우리는 함께 했고, 마침 같은 해에 나란히 아들을 낳으면서 엄마로서의 삶까지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피아노를 사랑하는 취미도 같고, 책을 좋아하는 것도 같고, 무엇보다 착한 친구는 나의 고집스러운 성격까지 온전히 받아주었다. 덕분에 가족끼리 함께 어울려 여행도 여러 번 다녀올 정도로 오늘날까지 일상을 함께 공유하는 소중한 친구이기도 하다.
H는 한국에 올 때마다 할머니를 뵙고 싶어 했다.
멀지 않은 곳에 계셨지만, 이런저런 가족 간의 사정으로 인해 좀처럼 발길을 뗄 수 없어서 속상해하면서도 할머니를 보고 싶어 했다. 핏줄이란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어른이 되어 나의 부모가 아이들의 조부모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니, 할머니의 사랑은 엄마와는 또 다른, 그저 무한하고 크고 위대하고 한없이 너그러운 그런 마음이 아닐까 싶다. 나의 엄마가 나에게는 주지 않은 애정을 손자들에게 쏟는 걸 볼 때마다 복잡한 기분이 드는 건 나뿐일까.
결국 그녀는 한국에 오지 못했다.
비행 시간만 10시간 넘게 걸리는 땅에 사시는 H의 부모님만 부랴부랴 다음날 오전 한국행 비행기를 타신다고 했다. 할머니의 마지막을 보내드리지 못해 속상해 하는 친구의 모습에, 나라도 대신 가서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방도 아니고 불과 한 시간이면 닿는 곳인데, 내가 직접 뵌 적은 없는 분일지언정 내가 소중하게 아끼는 사람이 그리워하던 분이라면 인사를 드리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싶었다.
다음 날 저녁, 가족들의 저녁을 챙기고 검은색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은 후 차키를 들고 집을 나섰다. 인천공항까지 이어지는 도로는 퇴근시간이 지나서인지 막힘이 없었고, 덕분에 1층 도착장 앞에서 친구의 부모님을 20년 만에 뵙게 되었다. 20년 만이라는 건, H가 이민을 가던 날 이삿짐 트럭에 짐을 싣고 울면서 손을 흔들 때 친구 옆에서 부모님도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너무나 미안하지만 몇 년 전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탓에 그게 정말 마지막이었다. 그때 잠시나마 친구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을 뿐이지만, 누가 보아도 유전자가 대를 거쳐 이동했다는 생명의 신비를 느낄 수 있었다.
이후로 사진으로나마 부모님의 얼굴을 뵈었고, 혹시 몰라 아버님의 연락처까지 받아 도착장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지켜보다 한눈에 두 분을 알아뵈었다. 유전자는 물려받은 자손의 나이가 들어갈수록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의 동일성이 높아지는 걸까. 요즘 내 사진을 보면 부모님의 예전 모습과 너무나 닮아서 흠칫 놀라곤 하는데 친구도 그런 것 같다.
친구의 부모님은 내가 마중 나왔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신 것 같았다. (친구가 귀띔을 하려고 했을 땐 이미 비행기에 탑승하신 상태였다) 괜히 민폐를 끼쳤다며 연신 죄송해하셔서, 그저 같이 오지 못한 H 대신 마음이 쓰여서 제가 스스로 왔을 뿐, 친구가 부탁한 건 절대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다. 친구도 없이 부모님과 마주하는 건 처음이라 살짝 긴장했는데, 자꾸만 엄마 아빠 생각이 났다.
돌아가신 친구의 할머님은 1930년생이셨고, 아직 건강하게 지내시는 우리 할머니는 1931년에 태어나셨다. 나이도 엇비슷하시고, 생의 마지막을 요양병원이 아닌 자택에서 지내시는 것도 비슷했다. 병원이 아닌 집에서 거동하시는 것만 해도 사람들은 큰 복이라고들 했다. 비록 기억이 희미해서 손자, 손녀들을 알아보시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래도 스스로 청결을 유지할 수 있는 노후야말로 내가 바라는 제일 큰 소망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친구의 부모님의 모습에 엄마아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나는 결코 아빠와 살갑게 지내는 딸도 아니고, 할머니 손에 자란 것도 아니라서 무언가 애틋하거나 특별한 기억이 많다고 할 수 없지만, 늘 자녀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신 부모가 이제는 노년에 접어들어 돌봄의 역할이 자녀 세대로 넘어가는 순간이 왔구나, 하고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 엄마와 여행을 가서 내가 운전을 하고 길을 찾았을 때, 나직하게 엄마가 중얼거리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어릴 적엔 늘 엄마아빠가 널 지켰는데, 이제 반대가 되었구나."
공항에서 40분 정도 운전을 해서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가는 동안 친구의 부모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를 통해서 들었던 부모님의 이야기, 몇 달 전 우리 집에 찾아온 친구와 아들(부모님께는 손자) 이야기를 나누었다. 군인이셨다는 아버님은 그 시대 아버지들 특유의, 자상함보다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신 분이었지만 손자 앞에서는 영락없는 할아버지셨다. 엄했던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 자상한 할아버지가 되는 걸까, 이것도 평생 내가 풀지 못할 미스터리다.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말로만 듣던 친구의 친척들을 뵙고 인사를 드렸다.
어떤 분들은 내가 친구인 줄 알고, "네가 H냐?" 하며 어깨를 다독이셨다. 본인은 아니지만 마음만 들고 대신 찾아왔습니다.
할머님의 영정사진 앞에서도 인사를 드렸다. 부디 좋은 곳에서 평안하게 지내시길, 그곳에서 친구와 가족들을 보살펴주시길, 미처 날아오지 못해서, 아니, 올봄에 한국에 왔는데도 인사드리지 못해서 울고 있는 손녀의 마음을 헤아려주시기를.
친구의 부모님께도 인사를 드리고 장례식장을 나왔는데,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어머님은 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차 뒤쪽에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그 옛날 할머니가 그러셨듯, 이제는 부모님이, 그리고 언젠가 아이들이 크면 내가 그 시선을 물려받겠지.
다음 날 오후, 아이들에게 어제 친구 할머님의 장례식에 다녀왔다고 이야기했다.
첫째는 "그럼 우리 모두 건강하게 살다 죽는다면, 나이 순대로 아빠, 엄마, 나, 그리고 동생이 죽겠네?"라고 했다.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자 둘째는 엄마아빠가 죽으면 나 너무 슬퍼, 안돼... 하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죽는다는 게 뭘까, 하고 나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이들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눈을 감고, 못 움직이고, 말도 못하고 그러는 거." "이제 이야기 못하고 다시 못 만나는 거. 하늘에 가버리잖아."라고 얘기했다.
그게 어떤 건지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감정으로 다가오는지도 아직은 잘 모른다. 할아버지 두 분은 돌아가셔서 이제 사진 몇 장과 내 기억 속에만 남아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죽음이 어떤 것인지 이해했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지금도 가끔은 세상을 떠난 이들이 사실은 지구 어딘가에 영혼을 남겨놓고, 그들을 생각하는 이들의 마음 속에서 또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할머님도 아마 그분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오래오래 또 다른 삶을 사실지도 모른다.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그곳은 엄마아빠와 내 마음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