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똑같은 하루가 삶을 만들 거야

반복되는 일상이야말로 소중한 삶이라는..

by 무밍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첫째가 숙제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한글을 더듬더듬 겨우 읽고 쓰는 수준이라 학교생활을 잘할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을 했는데, 선생님 덕분인지 도서관에 다닌 덕분인지 다행히 수월하게 일기를 쓰곤 한다. 물론 맞춤법은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의 속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나름 재미있게 (몰래) 읽고 있는데, 어느 날 이런 문장이 눈에 띄었다.


"내 삶은 왜 매일 똑같을까. 학교 가고, 태권도 가고, 피아노 가고, 매일 똑같아서 지겹다."


문장을 읽고 순간 심호흡을 했다. 삶이 매일 왜 똑같이 굴러가는지, 벌써 지겹다고 느낀다고?

뭐라고 물어보면 좋을까 싶어 단어를 고르다 아무렇지 않은 척 툭, 하고 아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매일 하루가 똑같은 느낌이 드니? 학교 가고, 학원 가고 그래서 그런가?"

"응, 매일 같은 시간에 학교 가고 학원 갔다 오면 밥 먹고 숙제하고 자잖아. 맨날 똑같아."


"근데 우리 주말은 매번 다르게 보내지 않아? 공원도 가고, 여행도 가고, 할머니 집도 가고, 다양하게 지내려고 엄마 아빠는 노력하는데..."

"주말은 그런데, 평일은 똑같아. 맨날 같은 시간에 밥 먹고 같은 시간에 자야 하잖아."


"음, 근데 매일 같은 시간에 가지 않으면 헷갈리지 않을까? 매일 뭘 해야 할지 생각해야 하고... 그리고 사실 매일 같은 걸 하는 건 아니야. 학교에 매일 가지만, 어제와 다른 공부를 하잖아? 그럼 다른 걸 하는 거 같은데."

"그런가...? 하긴 지난주에 만든 로봇이랑 이번 주 만들 로봇이 다르긴 하지."

"매일 반복되는 삶이 사실은 제일 성장하는 걸지도 몰라."


알람 소리가 없어도 아이는 햇살이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아침이면 누구보다 먼저 잠에서 깬다.


아침식사는 대체로 비슷하다. 밥에 오차즈케를 넣거나, 참치를 넣고 김을 싸서 주먹밥을 만들거나, 계란 프라이를 올리고 달콤한 맛이 나는 간장 소스를 뿌려서 비벼 먹거나, 식빵을 토스터에 넣고 노르스름하게 익혀 잼을 올리거나, 혹은 시리얼과 우유가 그 자리를 대신하곤 한다.


시계의 짧은 바늘이 8과 9 사이, 긴 바늘이 6에 가면 남편은 회사로 출발하고 첫째는 학교에 간다.

그 바늘이 다시 조금 더 움직여서 3에 도달하면 둘째는 후다닥 양치를 하고 세수하고 유치원 가방을 멘다.


30년 넘은 나무가 숲을 이루는 단지 안 셔틀버스 정류장에는 분주한 아침을 보냈을 익숙한 얼굴들과 아이들이 나타난다.

나와 아이가 노란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건너편 관리실 입구에는 하얀 얼굴의 여자가 우리처럼 매일 같은 시간에 회색 버스를 탄다. 버스에 적힌 이름을 보아하니 발달장애인들이 다니는 통원형 데이케어 센터인 것 같다. 그 버스가 지난 후 3분 후에는 또 다른 승합 차가 와서 오도카니 기다리던 할머니를 태우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매일 쌓이는 먼지를 훔쳐내고, 매일 쓴 그릇을 정리하고, 매일 입고 난 빨래를 돌리고 햇볕에 넌다.

어제도 빠진 머리카락이 오늘도 또 빠져서 바닥에 수북하다.

머리카락이 언제 자라는지는 보이지 않는데 빠지는 머리카락만 이렇게 많다니 조만간 반짝반짝 대머리가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집안일은 아무리 해도 땀 흘린 티가 별로 나지 않지만, 하루 이틀 게으르면 금방 먼지가 쌓이고 어딘가가 삐걱거린다. 손때묻은 스위치를 닦을 때마다, 지금 이 한 번을 건너뛰면 다음번에는 세 겹의 때를 지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매일 쌀 컵 그득히 쌀을 채워 두 번 넣고 취사 버튼을 누르면 같은 시간에 집안엔 밥 냄새가 퍼진다.

매일 같은 길을 걷는다. 나무는 어제와 같은 곳에 있지만 잎이 조금 노래졌다.

매일 같은 곳에서 떡볶이와 잉어빵을 파는 부부는 오늘도 같은 시간에 트럭을 몰고 와서 철판에 떡을 쏟는다.


매일 같은 시간에 아이들과 앉은뱅이책상에 둘러앉아 공부를 하고 하루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공부하는 자리는 같지만, 어제 마친 곳에서 한 페이지를 더 넘겨 새로운 것을 배운다. 어제는 가, 거를 겨우 읽던 둘째는 오늘은 고, 구를 읽고 기뻐한다. 좋아하는 친구 이름에 '구'가 들어가는데 드디어 쓸 수 있게 되었다며 웃는다.


피아노 뚜껑을 열고 어제 친 곡을 다시 쳐본다. 다섯 번쯤 같은 구간을 반복하자 어제는 치지 못했던 건반 사이의 화음이 들린다. 앞으로 100번쯤 같은 곡을 다시 친다면, 매일 같은 곡을 그렇게 되풀이해서 친다면 며칠 전에는 치지 못했던 음악을 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늘 그런 건 아니지만.


회사에서, 학교에서, 유치원에서, 혹은 다른 곳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낸 가족들이 집으로 모여든다.

밥을 먹고, 오늘도 변함없는 하루를 보내고 매일 저녁 아홉시 삼십분이 되면 침대 품에 안길 시간이다.

그렇게 매일 엇비슷한, 하지만 어제와는 분명히 다른 오늘이 흐른다.


대만의 소설가 천쉐가 쓴 <오직 쓰기 위하여>를 읽었다.


작가는 고달픈 생계를 위해 야시장에서 옷을 팔면서도 끝없이 글을 썼다. 그녀에게 글과 이야기란 삶을 지탱하게 해 주는 유일한 지지대였다. 글을 쓰는 이들은 유명해지기 위해서도 아니고 돈을 벌기 위해서도 아니고,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홀린 듯 쓸 수밖에 없다던데, 천쉐도 그랬던 것 같다. 소설가의 30년은 매일 비슷하고 단순한 삶이었지만 그 순간들이 모여 터질 듯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은 삶이라는 커다랗고 투명한 병에 물을 조금씩 채워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한 방울씩 물을 채워 넣다가, 때로는 여행이나 특별한 사건이라는 잉크를 떨어트린다. 어떤 것은 아주 옅어서 금방 투명한 물에 흔적 없이 녹아들지만, 어떤 잉크는 너무 진하고 강력해서 물 전체를 물들이곤 한다. 때로는 매일 진한 핏방울이 스며들기도 한다. 그 방울들이 모여 내 삶의 물을 어떤 빛으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삶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들.


좋은 기억들은 물에서도 녹지 않는 유리구슬로 만들어 언제든 꺼내볼 수 있게 만들고 싶다.

삶에서 가장 힘겨웠던 순간은 다시 일상의 물을 채워 옅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번 스며든 물감이 옅어지기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때야 비로소 매일 반복되는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언젠가 세월이 흐른다면 아이도 반복되는 하루야말로 삶이라는 걸 깨달을 날이 올까.


당장 다음 주 피아노 학원 연주회를 앞두고 반복되는 연습에 지친 나야말로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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